약속 시간이 되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으로 빨리 와달라는 다급한 목소리. 내게는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그 목소리다.
식은땀이 나고 울렁거린다는 엄마는 집에서부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남편과 다르게 나는 누구보다 침착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해서다. 교복을 입고서 달려다녔던 순간들이 쌓여서 그렇다. 토하면서라도 빨리 응급실에 가야 해. 급하게 비닐봉지를 챙겨 남편 차에 엄마를 태웠다.
한 손으로는 엄마의 등을 두드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나의 지갑을 찾는다. 정확히는 지갑 속 종이를 찾는다. 엄마가 10대부터 60대인 지금까지 수술했던 이력과 현재 복용 중인 약. 먹으면 잠이 안 오거나 피부 발진을 일으키는 약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머릿속을 빠르게 비운다. 연휴 동안의 히스토리를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한다."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라는 질문에 최대한 빨리 팩트만. 우선순위 위주로 생각해내야 한다. 이번에는 정리가 잘 안 됐다. 나의 기억이 엉켜있었다.
엄마랑 통화한 시간, 카톡 내역들을 훑으며 아침은 몇 시에 먹었는지, 정확하게 몇 시부터 아팠는지 증상들을 정리했다. 이런 세세한 정보들이 원인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해마다 5번에서 10번, 그렇게 반복된 시간이 15년 넘었다. 응급실만 백 번은 족히 갔을 걸. 나는 베테랑 보호자다.
"어떻게 오셨어요?"
"우선은 명치 통증 때문에 왔고요, 2시부터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다고 했어요. 3시경에 집에서 한 번, 오는 길 두 번 토했고요. 아침은 10시경에 죽 세 숟가락 정도 먹었어요. 허리디스크 염증 때문에 소염진통제를 2주 정도 복용했는데 4-5일 전부터 명치가 아프다고 했어요. 디스크 수술은 5년 전에 했고, 몇 주전 mri 찍었는데 재발은 아니라고 진단받았고요."
"그 외에도 저희 엄마 수술은 이렇게 하셨는데요. 이 종이를 봐주세요. 명치가 아픈 건 평생 그랬어요. 담도에 결석이 생겨서 시술했던 이력도 있고요. 이 병원 ○○○ 교수님 예약일자까지 기다릴 수 없이 통증이 심했고요. 그래서 어제 급한 대로 동네 병원에서 ct 촬영해 보려고 갔다가 조영제 넣는데 혈관이 터졌어요."
"그래서 팔이 이렇게 부어있고요. 어제 터졌는데 오늘 조영제 또 넣어도 이상 없나요? 혈관이 워낙 약해서 혈관 찾느라 주사를 여러 번 찔러서 팔이 이렇게 멍 투성이에요. 잘 좀 찾아주세요 부탁드려요."
여기까지가 나의 첫 번째 인계 작업이다.
아픈 환자는 이것들을 다 기억해 낼 수 도 없고 말할 정신도 없다. 히스토리를 설명하는 건 예전부터 내 몫이었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 해야 알맞은 응급처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응급실 도착 후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꼭 말해야 할 것들을 전달하고 빠짐없이 질문한다.
보호자 말에 주사가 바뀌고 선생님이 바뀐다. 내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 엄마를 덜 아프게 하기 위해서.
응급실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접수부터 각종 기본검사를 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더욱 응급한 환자 순서에 밀려 기다린다. 응급실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료진에게 증상 설명하기를 반복한다. 또 기다린다. 또 설명한다. 또 종이를 보여준다.
종이를 본 선생님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꼼꼼하다며 놀라는 사람과 이렇게 가지고 다니는 거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 나는 그저 진화한 사람일 뿐인데.
세 번의 주사 바늘 찌름 끝에, 엄마는 두 번째 손가락 혈관을 통해 겨우 수액을 맞는다. 코로나가 생긴 후 보호자는 한 명밖에 들어올 수 없다. 고달픈 일이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는 남편에게 5시간은 걸릴 거라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남편에게는 늘 면목이 없다. 하지만 내 감정은 사치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엄마가 오후 4시 반에 응급실 침대에 누웠으니 밤 9시에는 집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있는 희망 없는 희망을 다 끌어모아 10시쯤엔 나도 침대에 누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내 집에 눕게되면 얼마나 푹신할까.
하지만 나는 딱딱한 보호자 의자에 앉아 자정을 넘기고도 한참을 더 깨어 있었다.
보호자 생활은 늘 그렇듯 예상보다 길고 대부분 외롭다.
옆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 몇 안 되는 커다란 에피소드일까? 이들에게 오늘은 특별한 하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