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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이 길어지면, 대답도 잃습니다.

by 탄만두


많은 이들이 내게 "엄마는 이제 좀 괜찮으셔?" 하고 묻는다. 나는 그 질문에 익숙해지는 동시에, 점점 더 대답을 잃어간다.


그저 순수한 안부와 걱정일 뿐인데. 버튼이 눌리며 울컥하는 건 되풀이되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나에게도 처음은 있었겠지. 그 하루는 짧은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정말 대박 사건이 있었다면서.


어지럼증이 시작된 엄마의 전화를 받는 순간 내 앞에 있던 사람들. 나와의 약속이 되어있던 어떤 이들. 소개팅 당일, 오랜만에 만난 친구. 주말 출근과 회의실. 기쁜 마음으로 출발했던 여행지에서 되돌아오던 차 안의 무거운 공기와 침묵.


이런 순간이 수년간 반복되며 나는 '대답'을 잃었다. 마음이 지옥이어도 내뱉을 수 있는 '대사'를 할 뿐이다.


오늘은 일단락되었다고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일단락 [一段落]
일의 한 단계를 끝냄

지금 난 몇 단계에 있는 건가요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아무도 몰라. 하루만 못 자도 폭탄은 다시 터질 테니까. 어제의 응급상황을 일단락시켰을 뿐, 오늘 밤 못 자면 내일은 또다시 응급이 되는 걸.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그 병은.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인 나의 생에도 달라붙어있다. 결혼식 날짜와 신혼여행 일정을 정할 때에도 엄마가 어지럽지 않은 날은 언제일까를 우선에 두었다.


15년 동안 반복되던 재발의 계절을 피하고,

어택이 자주 오는 환절기도 제외하고,

하객들이 오기 힘든 시즌까지 걸러내고 나니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었다.






여행을 가도 엄마의 컨디션을 확인해야 풍경이 보이고 음식 맛이 느껴졌다. 엄마에게서 답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 집중이 잘 안 됐다. 잠을 잘 잤다거나, 괜찮다는 답변을 받아야 마음 편히 움직이고 웃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계획형 인간이거나 걱정이 많은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스트레스 안 받아야 좋아지는 병이라니.

무슨 이딴 병이 다 있어.


약으로도 주사로도 각종 민간요법으로도 재발을 막을 수 없다니. 영원한 완치가 없다니. 수소문해 이병원 저 병원 다녀봐도 하는 말은 거기서 거기였다. 평생을 동반자처럼 잘 관리해야 하는 관리병. "환자분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재발해도 그러려니 하세요." "마음을 비우세요." 이석증과 메니에르병 환자들이 우울증을 1+1처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내 감정은 뒤로 한 채 엄마의 스트레스 관리만을 1순위에 두었다. 늘 죄인이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엄마였다. 가끔은 못된 엄마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원망할 수 있었을까. 미워할 수 있었을까?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까?


뇌 mri를 찍고 입원한 엄마를 보며 미안해하지 말라고, 자식이 하지 누가 하냐고 가장 잘하는 씩씩한 보호자 연기를 했다. 공휴일 응급실과 이틀의 입원. 뇌 MRI와 CT는 다 정상. 정상이라는 소리는 계속 들어도 힘이 빠진다. 단련이 안 돼. 내 상황은 늘 비정상인 걸.







역시나 귓속 그놈이 원인이었다. 병원비는 80만 원.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괜찮다 말고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어.


내일도 누군가

나에게 이런 안부를 묻겠지.


"엄마는 이제 좀 괜찮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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