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이 망한 것 같나요? 당신은 실패한 게 아닙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전하는 다정함의 힘

by 잇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후회합니다. 그때 공부를 더 했더라면, 그때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주식을 샀더라면... 현재의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일수록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커져만 갑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도 그렇습니다. 미국 이민 와서 차린 세탁소는 세무조사를 당해 압류 위기이고, 남편은 이혼 서류를 내밀고, 딸과는 원수처럼 싸웁니다. 그녀의 인생은 누가 봐도 실패작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에게 수천 개의 다른 우주(멀티버스)가 열립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쿵후 마스터이기도 하고, 화려한 영화배우이기도 하며, 존경받는 요리사이기도 합니다. 그 찬란한 모습들을 보며 에블린은 절망합니다. "수많은 우주의 에블린 중에서, 왜 하필 나만 이렇게 엉망진창인 거야?"








당신이 실패한 이유 :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




에블린은 자책합니다. 내가 멍청한 선택들을 계속했기 때문에 수많은 우주의 에블린 중, 가장 멍청하고 가장 실패한 최악의 에블린이 된 것이라고요. 그런데 다른 우주에서 온 남편(알파 웨이먼드)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줍니다.


"당신이 모든 우주를 통틀어 최악의 에블린이기때문에 당신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어요."


무슨 말일까요? 다른 우주의 성공한 에블린들은 이미 운명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쿵푸를 잘하는 에블린은 쿵푸밖에 못 하고, 노래를 잘하는 에블린은 노래밖에 못 합니다. 이미 100 으로 꽉 차 있어서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의 에블린은 모든 꿈을 포기하고 실패했기에,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빈 공간이 가장 넓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것이 없기에, 그녀는 모든 우주의 능력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의미로 2026년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위로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이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고 느껴지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실패한 게 아니라, 아직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남들보다 훨씬 많이 남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보았기에,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진 세계




영화 속 에블린의 딸 조이는 사고로 인해 수천 개의 우주를 동시에 살아가게 된 존재입니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물감에 비유해 볼까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색깔은 저마다 아름답고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색깔 물감을 한 통에 다 붓고 섞어버리면 무지개색이 될까요? 아닙니다. 그냥 칙칙한 검은색이 되어버립니다. 조이의 머릿속이 바로 그렇습니다. 어떤 우주에서는 내가 영웅이고 어떤 우주에서는 살인자입니다. 어떤 우주에서는 억만장자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손가락이 핫도그인 괴물입니다.


"내가 여기서 사람을 구하면 뭐 해? 저쪽 우주에서는 내가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성공하면 뭐 해? 저쪽 우주에서는 내가 굶어 죽고 있는데."


모든 인생의 결말을(스포일러) 동시에 다 알아버린 그녀에게, 노력이나 성취, 도덕 같은 건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맹물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겁니다. 조이는 화가 난 게 아니라 그저 모든 것이 지겨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시끄러운 우주 속에서, 자신을 영원히 사라지게 할 정적을 찾아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겁니다.






검은 베이글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




거대한 허무(베이글) 앞에서 에블린은 처음엔 주먹으로 맞서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길 수 없었죠. 어둠을 더 큰 어둠으로 덮을 순 없으니까요. 그때 에블린은 깨닫습니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조이의 마음을 구하는 건 강력한 힘이 아니라 다정함이라는 것을요.


그녀는 이마에 제3의 눈을 뜹니다. 비장한 각성이나 초능력이 아닌 문구점에서 파는 장난감 플라스틱 눈알을 이마에 턱 하니 붙인 겁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자, 적들의 공격이 아니라 그들 마음속의 결핍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덤벼드는 적의 척추를 접어버리는 대신, 척추를 맞춰주는 시원한 마사지를 해줍니다. 총을 쏘려는 적에게,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의 향수를 뿌려줍니다.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혼란스러울 때는 더더욱."


다정함이 왜 구원일까요? 조이의 아픔은 우주가 너무 커서, 나는 먼지보다 못해 라는 큰의미의 우울 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따뜻한 쿠키를 입에 넣어주고, 뭉친 어깨를 주물러주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저 멀리 있는 차가운 우주에서 지금, 여기 현재의 감각으로 돌아옵니다.


거창한 성공이나 명예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것들도 결국 시간 앞에 사라지니까요. 우리를 허무의 블랙홀 밖으로 끄집어내는 건, 오늘 아침 건넨 "밥 먹었어?"라는 안부 인사, 힘들 때 말 없이 잡아준 손의 체온 같은 지극히 사소하고 구체적인 사랑뿐입니다. 그렇기에 에블린은 말합니다.


"우주는 무의미할지 몰라도, 지금 너를 안고 있는 내 온기는 진짜야."


이러한 작고 따뜻한 감각만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합니다.






당신의 이번 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에블린은 화려한 우주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지긋지긋한 세탁소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여전히 세금은 밀려 있고, 가게는 난장판.. 바뀐 건 없습니다. 하지만 에블린의 눈빛은 달라졌고 그녀는 이제 잘 알고있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현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지고 볶는 이 순간이 수천 개의 우주 중 가장 소중한 나의 자리 라는 것을요.


"다른 생에서는, 당신과 함께 세탁소도 하고 세금도 내며 살고 싶어."


지금 당신의 생이 망한 것 같나요?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수많은 우주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인간적인 드라마를 써 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당신의 실패는 무능함의 증거가 아니라, 당신이 아직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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