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째_연예인 2화

공짜 점심은 없다.

by 코와

기태는 경찰에서 밤샘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유라는 철저하게 준비된 대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기태와 자발적으로 만났던 과거의 관계마저 '위력에 의한 성폭행'(주석1)으로 둔갑시켰다. 유명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력 있는 제작 관련 회사 대표 기태의 지위를 이용해, "방송에 꽂아주고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며 성상납을 강요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사실 기태는 경찰 조사 단계에서는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 창피해 다른 변호사를 선임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합의를 보라"는 절망적인 조언뿐이었다. 결국 검찰 조사까지 모두 끝나고 재판을 코앞에 둔 시점이 되어서야, 기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창 모임에서 만난 상길을 붙잡고 사무실로 찾아왔던 것이다. 상길은 기태의 서류를 넘겨받자마자 사무장과 함께 증거와 경찰 초동 조사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석 달 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재판부.


증인석에 앉은 유라는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을 연출했지만, 눈물을 흘릴 때 돋보이도록 짙은 마스카라와 분홍 립스틱을 덧바른 채 수수한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검사의 주신문 내내 일부로 검은 눈물을 훔치며, 기태의 협박에 못 이겨 끔찍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고 열연을 펼쳤다. 기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만 쥐어뜯고 있었다.


"이상으로 증인 신문을 마치겠습니다."


검사가 자신만만하게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내리자, 재판장이 피고인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고인 측 변호인, 반대신문 하시겠습니까?"


"네, 재판장님."


상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상길은 피고인석 마이크를 당겨 잡고, 서늘한 눈빛으로 증인석의 유라를 직시했다.


"증인. 아까 검찰 신문에서, 피고인이 캐스팅을 빌미로 증인을 지속적으로 협박하여 성관계를 강요했다고 하셨죠?"


"네... 흑... 거부하면 방송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유라가 가녀린 어깨를 떨며 대답했다. 상길이 재판장과 유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류 한 장을 빼들었다.


"증인은 경찰 조사에서, 두 번째로 잠자리를 가졌던 작년 10월 15일 밤, 강남의 한 호텔로 피고인에게 억지로 불려가 강압적인 성관계를 당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맞습니까?"


"네, 똑똑히 기억합니다. 첫 번째 일본 촬영 때는 솔직히 저도 술도 마셨고, 방송에 뜨고 싶은 마음에 분위기에 휩쓸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인 그날은 달랐어요. 전 술도 한 모금 안 마셨고 분명히 싫다고 반항했는데도 억지로 호텔로 불려가서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날의 기억이 너무 생생합니다."


상길이 준비된 증거 서류를 법대 위로 제출하며 마이크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장님, 변호인 측 증거 제1호증, 피고인 최기태의 출입국 사실 증명서 및 비행기 탑승권 구매내역입니다."


재판장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상길이 유라를 향해 비꼬듯 말했다.


"증인. 작년 10월 15일은 피고인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피고인은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일주일간, 본인의 아내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법정이 순간 술렁였다. 유라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어... 아, 아니... 제가 날짜를 착각한 것 같습니다. 워낙 자주 불려 나가서..."


"자주 불려 나갔다? 좋습니다. 그럼 날짜를 착각할 수 없는 가장 최근 사건으로 가보죠. 피고인이 긴급 체포 되었던 부산 해운대 호텔 사건입니다. 증인은 이날 역시 피고인의 협박에 못 이겨 호텔로 불려갔고, 강제로 추행과 간음을 당한 뒤 극심한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진술했습니다. 맞습니까?"


"네! 그날은 확실합니다! 제가 부산에 촬영차 내려간 걸 알고 피고인이 강제로 불렀습니다. 전 그날 이후로 트라우마로 남자만 봐도 구역질이 나고, 밤에 잠도 못 잡니다!"


유라가 악에 받친 듯 큰소리를 냈. 상길은 대답 대신 리모컨을 들어 법정 중앙의 대형 스크린을 켰다. 화려한 조명이 터지는 클럽 안에서 샴페인 잔을 들고 친구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유라의 사진이었다.


"재판장님, 변호인 측 증거 제2호증. 증인이 본인의 공개 인스타그램 계정에 직접 올린 사진입니다. #부산핫플 #해운대클럽 #오늘밤찢어. 업로드 시간은 부산 호텔 사건이 발생한 불과 몇 시간 뒤인 다음 날 새벽 2시입니다."


재판장의 미간이 무섭게 찌푸려졌다. 검사조차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길이 유라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며 날 선 질문을 던졌다.


"강간을 당하고 극심한 수치심과 트라우마에 시달려 남성 혐오증까지 생겼다는 피해자가, 사건 발생 몇 시간 뒤에 해운대 클럽 룸을 잡고 남자들과 어울려 샴페인 파티를 벌인다? 증인. 당신이 말하는 그놈의 트라우마는 클럽 스피커 소리만 들으면 자연 치유되는 기적의 병입니까?"


"그, 그건... 친구들이 위로해 준다고 억지로 끌고 가서..."


유라가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자, 상길이 다시 리모컨을 눌렀다.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억지로 끌고 갔습니까? 그럼 영상 하나 더 보겠습니다. 변호인 측 증거 제3호증, 같은 날 새벽 해운대 클럽 내부 CCTV 영상입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클럽 내부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사진 속 슬립 원피스 차림의 유라가 남자들과 어울려 스테이지 중앙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남자 바지춤에 비비며 격렬하게 춤을 추고,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환호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누가 보아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흥에 겨운 표정이었다.


"이게 억지로 끌려간 사람입니까? 결정적으로 증거 제4호를 보시죠. 클럽으로 향하는 호텔 엘리베이터 안 영상입니다."


화면 속에는 겉옷을 걸쳐 입은 유라가 엘리베이터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금빛으로 번쩍이는 엘리베이터 장식 벽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정성스레 립스틱을 덧바르고 눈화장을 수정했다. 조금 전 강간을 당해 경찰에 신고한 넋이 나간 피해자라기엔 메이크업을 고치는 손길이 너무도 섬세하고 여유로웠다.


"증인. 엘리베이터 금색 장식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아주 꼼꼼하게 화장을 고치고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고 친구들에게 억지로 끌려간다는 피해자가, 엘리베이터 벽면을 거울삼아 화장부터 고칩니까? 게다가 증인은 피고인에게 '이제 감독님은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네'라는 말을 남기고 호텔 방을 나섰죠. 피고인은 당신을 찾으러 1층 로비로 내려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게 체포됐고요. 성상납? 위력에 의한 강간? 아니죠. 당신은 피고인에게 이혼 요구도 거절당하고, 스폰서 노릇을 하려 해도 연락이 잘 안 돼 더 이상 돈줄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으니, 합의금이라도 크게 뜯어내려고 철저히 기획해서 경찰을 부른 겁니다!"


유라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도, 아니라고 악을 쓰지도 못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판장과 상길을 번갈아 보던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 당혹감과 수치심이 뒤섞인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완벽했던 피해자 연기가 무너져 내린 자리에 남은 것은, 궁지에 몰린 거짓말쟁이의 비참한 침묵.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무대 위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배우뿐이었다. 법정을 가득 채웠던 기만과 거짓의 성벽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서초동 강상길 법률 사무소.


무죄 판결을 받아낸 기태가 잔뜩 독이 오른 얼굴로 상길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상길아, 그 미친년 당장 무고죄로 쳐넣어 줘. 나 진짜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넘어간다. 그년 때문에 피해 본 거 다 물어놓게 민사도 걸어줘."


상길은 묵묵히 책상 서랍을 열어, 미리 작성해 둔 서류 봉투 하나를 기태 앞으로 툭 밀어주었다. 유라를 상대로 한 무고죄 및 손해배상 청구 고소장 초안이었다.


"안 그래도 보여주려던 참이다."


기태가 고소장을 집어 들려 하자, 상길이 펜으로 서류를 지그시 내리누르며 입을 열었다.


"기태야."


"어, 어? 왜."


"너, 그 유라라는 애가 진짜 널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사랑해서 만났다고 생각하냐?"


기태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지... 결국 내 돈이랑 방송국 인맥 보고 꼬인 거, 나도 다 알았지."


상길이 펜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 20대 초중반, 외모 반반하고 한창 잘나가는 여자애들이 미쳤다고 머리 빠지고 배 나온 40대 유부남을 좋다고 쫓아다니겠냐? 여자들도 자기 어리고 예쁠 때가 제일 비싼 거 다 안다. 근데 굳이 나이 많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난다? 뻔한 거야. 젊고 잘생긴 놈들한테서는 뽑아먹을 수 없는 확실한 '돈'과 '권력'이 필요하니까."


기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길이 서류를 기태 쪽으로 완전히 밀어주며 어깨를 툭 쳤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어린 여자가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고 다가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청구서가 날아오게 되어 있어. 이번엔 내가 그 청구서를 찢어준 것뿐이야. 다음번엔 네가 직접 찢어야 할지도 모른다. 명심해라. 바지 함부로 내리지 말고."


기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밖의 화려한 연기 속에서 알량한 욕망을 쫓았던 대가는 뼈저리게 아팠다. 상길의 차갑고도 현실적인 경고가 사무실의 공기를 가르며 기태의 귓가에 묵직하게 박히고 있었다.


그 후 유라는 변호사를 통해 상길에게 합의금 5천만 원을 제시했으나, 기태의 완강한 반대로 합의가 무산되었다. 결국 유라는 법원에 형사 공탁(주석2)을 걸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재판을 거쳐 무고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주석1: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 폭행이나 협박이 없더라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고 간음하는 범죄를 뜻한다. 직장 내 직급, 연예계나 문화계 등 권력 관계가 명확한 곳에서 발생하는 성범죄에 주로 적용된다.


주석2: 형사공탁 - 형사사건의 가해자(피고인)가 피해자와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경우, 피해 회복을 위해 일정 금액을 법원에 맡겨두는 제도. 재판부는 이를 피고인이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한 사정으로 보아 양형(감형)에 참작하기도 한다.

금,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