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선물하는 시간: 루게릭 환자의 가래를 뽑으며

by 박지숙

호흡기내과 외래의 하루는 쉼 없이 돌아간다. 수많은 환자의 차트와 밀려드는 질문들 사이에서 간호사의 시계는 남들보다 배는 빠르게 흐른다. 이곳에는 유독 숨쉬기조차 버거운 이들이 모여드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들은 젊은 나이에 루게릭병(ALS)을 마주한 환자들이다.


굳어가는 몸, 차오르는 가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박사가 앓았던 병으로도 잘 알려진 루게릭병은 잔인하다. 정신은 명료한데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간다. 가래 한 모금 스스로 뱉어낼 힘조차 앗아가기에, 누군가 기계로 숨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환자는 자신의 분비물에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느껴야 한다.

진료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환자의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는 깊어진다. 외래 대기실 한복판에서 가래가 차올라 얼굴이 붉어지는 젊은 환자를 마주할 때면, 간호사인 나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소용돌이친다.


찰나의 짜증, 그리고 깊은 미안함

"선생님, 우리 애가 가래 때문에 숨을 못 쉬어요. 한 번만 뽑아주시면 안 될까요?"

보호자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솔직히 고백하건대 찰나의 '부담감'이 먼저 고개를 든다. 당장 처리해야 할 투약 지시와 검사 안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바쁜 시간. '하필 지금, 여기서...'라는 못난 생각이 아주 잠시 마음 한구석을 스치고 지나간다. 업무의 무게가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석션 카테터를 준비해 환자 곁으로 다가가는 순간, 나는 내 마음속에 일었던 그 짧은 짜증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간절하게 나의 손길만을 바라는 환자의 눈빛, 그리고 대신 아파해 줄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가족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귀찮음은 순식간에 부끄러운 미안함으로 바뀐다.


눈으로 전하는 고맙다는 인사

"조금만 참으세요, 시원하게 해드릴게요."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가래를 뽑아내고 나면, 막혔던 숨길이 터지며 환자의 거친 호흡이 잦아든다. 고개를 까닥일 힘조차 없는 젊은 환자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눈빛은 세상 그 어떤 언어보다 명확하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가족들의 손을 보면, 조금 전 내가 가졌던 마음이 못내 미안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져 온다.


간호사라는 이름의 무게

누군가에게는 그저 번거로운 '추가 업무'일지 모르지만, 이 환자에게는 생명이 오가는 절박한 '구조'였음을 다시금 새긴다.

나는 오늘도 반성하고, 다시 다짐한다. 나의 바쁨이 환자의 절박함을 가리지 않기를. 비록 반나절도 못 가 다시 불안해지고 흔들리는 부족한 인간일지라도, 적어도 이 가운을 입고 있는 시간만큼은 누군가의 막힌 숨을 틔워주는 다정한 손길이 되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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