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의사도 AI가 한다는데 왜 공부해요?"

대체되는 지식, 대체될 수 없는 선장

by 온설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시청한 다큐멘터리의 잔상은 생각보다 길고 차가웠습니다. 화면 속 로봇 수술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혈관을 이어 붙였고, 인공지능 법률가는 수만 페이지의 판례를 단 몇 초 만에 훑어 결론을 내리더군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거실에 정적이 흐를 때쯤, 중학생 아들이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저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엄마, 그런데 챗GPT가 나보다 공부도 더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잖아요. 의사나 변호사도 AI가 다 한다는데, 난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 거예요?”


중학교 2학년 아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가슴에 와서 꽂혔습니다. 대충 “학생이니까 해야지”라거나 “대학은 가야 하니까” 같은 낡은 대답으로는 아이의 예리한 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는 걸 직감했죠. 그날 밤, 저는 잠든 아들의 방문 너머로 책상을 보며 깊은 사유에 잠겼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정답을 맞히는 능력’을 실력이라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정답은 AI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내놓습니다. 계산기 앞에서 암산 실력을 뽐내는 것이 무의미하듯, 지식을 축적하고 인출하는 방식의 공부는 그 시효를 다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할까요?



다음 날 아침, 등교를 준비하는 아들에게 어젯밤 제가 찾아낸 진심을 건넸습니다.


“아들, 사실 산업시대에는 남들보다 조금 더 성실하게 매뉴얼을 익히는 게 부(富)를 쌓는 지름길이었어. 하지만 이제 그런 성실함만으로는 부를 쌓기 힘든 시대가 됐단다. 그건 AI가 훨씬 더 싸고 정확하게 해내거든.”


“그럼 제 가치는 무엇으로 증명해야 해요?”


저는 아이의 책상 위 단어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습니다.


“아들, 혹시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를 아니? 배의 낡은 널빤지를 하나씩 새것으로 갈아 끼우다 보면, 결국 나중에는 원래 있던 나무 조각이 하나도 남지 않게 돼. 그럼 그 배는 예전과 같은 배일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배일까?”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저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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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마찬가지야. 네가 지금 외우는 단어나 공식은 언제든 AI로 대체되거나 낡아서 교체될 널빤지 같은 거란다. 지식이라는 널빤지는 평생 끊임없이 갈아 끼워지겠지. 하지만 그 나무 조각들이 다 바뀌어도 그 배가 여전히 ‘너’라는 이름으로 항해할 수 있는 건, 재료 때문이 아니라 어떤 풍랑 속에서도 키를 잡고 방향을 결정하는 선장이 있기 때문이야.”



단순히 지식을 외우는 건 가성비 낮은 노동이자 널빤지를 가는 일일 뿐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문학적 사유는 그 배의 항로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경제적 무기가 됩니다. 수만 대의 AI 의사가 내놓은 데이터 중 환자의 삶에 가장 적합한 치료법을 최종 결정하는 의사, 수백 개의 AI 디자인 중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할 단 하나의 '결'을 골라내는 기획자. 결국 마지막 1%의 선택권을 가진 선장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구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엄마가 말하는 설계자의 안목이야. 널빤지는 AI가 훨씬 더 튼튼하고 빠르게 만들어줄 수 있지만, 그걸 조립해 어디로 항해할지 결정하는 건 오직 선장만의 것이란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안목 세 가지를 알려줄게.”


첫째는 '질문의 안목'이야. AI에게 단순히 "멋진 집 그려줘"라고 하는 사람과, "은퇴한 노부부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낮고 따뜻한 나무 집을 그려줘"라고 하는 사람의 결과물은 하늘과 땅 차이지. 어떤 데이터를 불러올지 결정하는 그 섬세한 문장 하나가 집의 가치를 결정한단다.


둘째는 '편집의 안목'이야. AI가 1초 만에 100개의 광고 문구를 써낼 때, "이건 너무 기계 같으니 버리고, 7번 문구의 단어 하나만 바꾸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겠는데?"라고 골라내는 눈이지. 99개를 버리고 살아남을 1개를 선택하는 그 감각이 실질적인 몸값이 된단다.


셋째는 '공감의 안목'이야. 기술은 효율만 보지만 설계자는 사람을 봐. AI가 최단 거리 배달 경로를 찾을 때, 설계자는 "비록 돌아가더라도 꽃집 앞을 지나는 경로가 배달원의 기분을 좋게 할 거야"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지. 기술에 온기를 불어넣어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안목의 힘이야.



“결국 지식이라는 널빤지를 아무리 많이 갈아 끼워도, 그걸 어떤 모양으로 엮어 어디로 갈지 결정하지 못하면 그건 그냥 나무더미일 뿐이야. 부품은 AI가 만들지만 하나의 의미를 만드는 건 선장인 네 안목이란다. 그 안목을 기르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시를 읽고, 역사를 배우며 인간의 마음을 공부하는 거야.”


미래의 공부는 '정답을 맞히는 노동'에서 '가치를 결정하는 경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널빤지를 가는 수고에 매몰되지 않고 배 전체를 조망하는 선장의 시야를 갖추는 것, 그것이 제가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진짜 공부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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