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여기까지
젖은 머리를 말리고는
단정한 랄프로렌 재킷과 모자를 걸쳤다.
몇 년 전 생일선물로 아내가 선물해 준 옷이다.
지금은 내 외출 유니폼이 되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작아졌는지,
약간 색깔이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비싼 재킷값만큼, 아내의 마음만큼의
단정함은 놓칠 수 없었다.
외출 준비는 언제나처럼 나와 아내가 마실
커피 두 잔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멍한 상태의 내 안은 비어 있는 것 같았으나
이미 나설 걸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치만 괜찮았다.
손에 들린 컵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고
방금 내린 커피는, 오늘 집을 나설 용기를 주었다.
내 안의 에너지는 조금씩 비어갔지만
나는 그것을 바깥에서 채워 올 수 있었으니까.
현관에 쭈그려 앉아 신발을 신었다.
허리에서 약간의 뻐근함이 느껴졌다.
어정쩡한 자세로 아이들의 신발을 신겨준 뒤
짐을 어깨에 둘러맸다.
새벽과 아침의 중간쯤 되는 시간이었다.
차에 올랐지만 실내는 고요했다.
아이들은 준비하는 동안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들의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나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시동을 걸었다.
부릉, 하는 알람 같은 소리가 묵직하게 퍼졌지만
나와 달리 아이들의 숨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직
일상을 깨는 날카로운 알람이 익숙하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말하지 않았지만
출발의 때를 알고 있었다.
덜 깬 도로 위,
젖은 길을 내비게이션이 앞서 나갔고
차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우리 가족은 특별히 종교를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의식처럼
새해 첫날에는 근처 사찰에 들렀다.
모처럼 가족이 다 같이 산길을 걷고
사찰에 올라 소원을 빌고
차게 얼기 직전의 약숫물을 들이켜는 의식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의식을 치르고 나면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신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나는 짐 말고는 챙겨 오지 않았는데.
오늘은 살아낼 각오만 챙겨 왔었는데.
웃음이 어느새 여기와 있었다.
웃음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걸음을 내딛기에는 충분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