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

어쩌다 여기까지

by 밤결




뜨끈한 커피와 얼기 직전의 약숫물,

아이들의 함박웃음에서 에너지를 끌어다 채워 넣었다.


환히 웃는 아이들에게 먼저 장난을 치며 달렸다.

쫓아온 아이들을 꽉 안아 들고 다시 사찰 안을 뛰어다녔다.

셋이 하나가 된 에너지가

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듯했다.




숨이 가빠 올 때쯤

아내의 외침이 들렸다.


“너네들! 뛰지 마!! 다쳐!!! 아빠 너도!”


아내를 돌아봤다.

걱정하는 듯, 화가 난 듯 외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아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묘하게 목소리에도 장난스러움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멈추다 발을 헛디뎌 “끼악” 하는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아내와 나는 눈을 맞추고 말없이 씨익 웃었다.




나는 아이들의 손을 다시 잡고

조금 전 보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사찰의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멀리 보이는 차의 문을 열기 위해 잠시 손을 놓은 사이

아이들은 발이 아프다며 보챘다.

몸도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아내와 나는 아이를 하나씩 안아 품고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말했다.


“아빠 아까 정말 재밌었어”




고요한 차에 나즈막한 히터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아이들은 졸린 듯, 눈이 까무룩 감기고 있었다.

분명 아침과 같은 적막함이었다.

다만 오후의 차 안에는 웃음의 온기가 가득했다.


나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미리 사둔

캔커피 한 잔을 열었다.

다시 집으로 향할 시간이다.




해가 뉘엿 질쯤 집에 도착했다.

오늘은 부모님과 저녁식사 약속이 있는 날이다.

저녁식사를 하기 전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들은 깨지 않았다.

아내는 그대로 아이들을 방에 눕히러 갔다.

나는 집을 청소하다가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앉아 쉬었다.


사찰의 종소리, 우스꽝스럽던 아이들의 모습,

아내의 외침과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천장을 바라보니 집이 새삼 넓게 느껴졌다.

문득 집 안의 적막함이 낯설어져 TV를 켰다.

공간을 채우는 TV소리에 괜히 마음이 편해졌다.


새해 특집 방송이 한창이었다.

TV속 사람들은 각자 새해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ㅇㅇ대학교에 합격하고 싶어요"

앳되 보이는 여학생의 인터뷰였다.


다음으로 키가 큰 남성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올해는 꼭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간절하게 새해 소원을 말했고,

어딘가 들떠 보였다.


"꼭 합격하실 거예요. 힘내세요!"

사회자는 그들을 응원했다.

응원하는 목소리에 힘이 느껴졌다.




화면이 화려한 색채의 광고로 전환됐지만

나는 계속해서 멍하니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특집 방송의 인터뷰에도 집중하지는 않았다.

열정이 느껴지는 말들 사이에도,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머물러 있었다.


'나에게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선택의 순간이 있었던가'


나는 아까 사찰에서도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이 빛을 바라지 않기를.

그래서 TV속 사람들이 낯설었던 것 같다.


마흔 살 자정에 시작된 '어쩌다 여기까지'의 혼란 속에서

나는 아직도 그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새해 첫날답게 식당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둘러보니 대부분 가족 단위의 식사자리로 보였다..

미리 도착한 부모님은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를 발견하곤 환히 웃었다.

한껏 자고 일어난 아이들도

"할머니!"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식당 여기저기에 웃음이 묻어났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평소처럼 식사를 시작했다.

정신없이 음식을 먹었다.

밥이 반 정도 남았을 때

고개를 들어보니 부모님은 아이들은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앉아 생선살을 발라주고 있었다.




부모님의 밥공기는 처음 그대로였다.

단지 모락모락 피어나던 연기만 희미해졌다.


나는 괜시리 부모님에게

"애들 알아서 잘 먹어, 음식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한마디 쏘아붙이곤, 아이들의 생선을 바르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그제야 밥을 한 술 크게 떴다.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재잘대며 생선살을 씹었고

그 모습을 보던 부모님은

우엉조림과 시금치를 집어 들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방금 발라낸 생선살을

아이들의 입에 넣어 줄지,

부모님의 밥공기에 올려줄지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내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마흔 살 자정에 시작된 '어쩌다 여기까지'의 질문은

그 날 저녁, 식탁 위에도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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