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인공이 된 이유
그 이후
그 아이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와 같이 다닐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모든 레크리에이션 활동에서 나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왜 굳이 삼류 드라마 같은 대본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그 아이들이 왜 그렇게까지
열연을 펼쳤는지까지.
우리 무리의 인원수는 홀수였다.
수련회 레크리에이션의 대부분은
짝을 맞춰야 하는 활동이 많았다.
아마 수련회에 오기 전부터
그들끼리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폭력처럼 보이지 않도록,
아주 교묘하게 그 각본을 짜두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초여름의 텁텁한 낮을
나는 꾸역꾸역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밤이 왔다.
참 야속하게도
방 배정은 수련회 오기 일주일 전쯤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담임 선생님도 친한 아이들끼리 방을 쓰는 것까지는
크게 관여하지 않으셨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과 친했기 때문에
당연히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 쉬는 시간에도,
저녁시간이 끝난 뒤 쉬는 시간에도,
그리고 점호를 받기 전까지의 자유시간에도
그 방 안에서조차
그 애들에게 나는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끼어들 틈은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밤이 되고, 점호가 끝나고,
불을 끄고 모두가 누워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만 감아버리면,
단 1초라도 빨리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면
이 지옥 같은 시간을
하루라도 빨리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일이 또 남아 있다는 생각에
잠은 쉽게 오지 않았고
나는 눈만 감고 누워 있었다.
내가 잠든 줄 알았는지
아이들은 내 머리맡에서 서로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몰래카메라의 성공담이었다.
그중에서도
다른 반 조연까지 착실하게 캐스팅했던 아이,
내가 그 아이가 좋아하는 애한테 친한 척을 했다며
우습겠지만 각본상으로는
이 삼류 드라마의 서브 여주인공이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야, 근데 쟤 우는 거 봤냐?
아니 솔직히 왜 우는 거야?
그냥 남자애들 관심받으려고 운 거 아님?
옆에 걔 있었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억울함과 동시에 깨달았다.
내가 ‘몰래카메라’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누구에게 캐스팅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이어진 말 한마디.
“남자 밝히네, 걔.”
서브 여주인공의 말이 끝나자
조연들은 자연스럽게 그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조연은
“아니야, 쟤 다른 애 좋아한다.” 라며
새로운 이름을 꺼냈다.
그렇게 또 다른 유언비어가 만들어졌고
그 아이들끼리 새로운 삼류 드라마의 각본을 상상하고
그들끼리 정해 놓고 비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가 정한 적도 없는
나도 모르는 이야기의 여주인공은 ‘나’
나는 또다시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껏 내가 모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며 넘기는 편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가족이든 타인이든
내 기분보다는 상대의 기분을 먼저 신경 쓰며
맞춰주는 쪽을 택했다.
싸우는 일은
정신적으로도 꽤나 귀찮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선택의 결과가
이런 말들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 아이들이 말하는 남자애들과 나는
그저 성별만 다를 뿐
그 애들과 같은 친구 관계였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기 시작하자
내 외모에 대한 말들도 아무렇지 않게 따라붙었다.
속된 말로
“쟤 주제에…”
같은 말들이었다.
외모 또한 특별히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스스로 만족하며 십오 년을 살아왔는데
그들은 고작 단 몇 시간 만에
내 평범했던 자존감을 바닥까지 낮춰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차라리 내가 정말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이어서
남자 주인공을 찾아다니며 연애라도 했다면
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그런 감정은 없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그저 남사친, 여사친 관계였을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있다고 내뱉는 그 남자아이들은
지금 떠들고 있는 애들이
그 이름들에게 더 많은 감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날 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첫째 날 밤을
소리 없는 눈물로 지새웠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