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은 답이 아니었다 (2)

화장실에서 먹은 베이컨 주먹밥

by 박태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은 꼭 삼류 드라마 같았다.


그 아이들은 생각보다 치밀했고

나와는 일면식조차 없는

다른 반 조연들까지 착실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반 아이들은 버스에서도 심심했는지 전화 연결을 시작했다.

그날의 조연들이었다.


그 조연들의 짜인 대본은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내가

일면식도 없는 그 조연들의 뒷담화를 하고 다녔다고 했고,


이 각본을 가장 열정적으로 짠 애

즉, 향후 서브 여자주인공이 될

그 애가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내가 호감을 가졌다는

근거 없는 소리도 해왔다.


그 이후 계속해서 발신인만 바뀌었을 뿐,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정말 아니라며,

오해라며

힘없는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버스 안에 있던

같은 반 아이들과 서브 여자주인공까지 열연을 보태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유언비어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나는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버스는 이제 막 출발했을 뿐이었다.

내 앞에는 지옥 같은 2박 3일이 통째로 남아 있었다.


수련회장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는 깨달았다.


백 점짜리 정답지라고 굳게 믿었던 나의 전학이,

사실은 마킹 실수 하나로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린

빵점짜리 시험지였다는 것을.


멈추지 않는 눈물 사이로 이상한 온도 차이가 느껴졌다.

버스 안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창밖에는 청량한 여름 풍경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도착한

수련회장에서 맞이한 첫 점심은 하필 ‘자유식’이었다.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들고

친한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는 시간.


사람이 살다 보면 어긋나는 일은

끝없이 어긋난다는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 당시

일하느라 바빴던 엄마는

전날 사 온 김밥을 통에 옮겨 담아 가길 바랐지만,


철없던 나는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굳이 손이 많이 가는 베이컨 주먹밥을 해달라며

떼를 썼다.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

기어이 과일까지 얹어 넉넉한 양의 도시락을 싸주셨다.


하지만 혼자가 된 내가 향한 곳은

친구들 곁이 아닌 화장실이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누르며,

나는 ‘눈물의 도시락’이 무엇인지 처음 맛보았다.


단 한 개라도 먹어야 고생하며 도시락을 싸준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할 것 같았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장소조차 모르는

그 여름의 꿉꿉한 공기 속 화장실에서

꾸역꾸역 삼켰던 베이컨 주먹밥의 맛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화장실 칸 안에서

주먹밥 한 알을 겨우 목구멍에 밀어 넣고 나오자,


거짓말처럼 그 아이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방금까지 나를 비웃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어디 갔었어? 우리 밥 같이 먹자고 하려 했는데.

그리고 아까 그거 몰카였어, 알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몰래카메라의 기승전결과 배우들까지 너무 완벽했다.


그런데도 버스에서 내리면서

굳이 나를 찾지 않았다는 걸,

아니, 내가 사라지길 바랐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태연하게

몰래카메라를 가장한 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몰래카메라였다면

그렇게까지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남은 수련회 일정은 아직 길었고,

이 모든 것이 이제 막 시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비릿한 눈물을 삼키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바보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아, 진짜? 그치, 몰카였구나.

다행이다. 나 화장실에 좀 있느라 몰랐어.”


그 비겁한 모르는 척의 웃음을

넘겨준 대가는 혹독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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