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와 바람 사이에서
무협지 코너의 가장 구석, 손때가 묻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비뢰도]. 제목부터가 요란하다. 20년전 수많은 독자를 밤새우게 만들었던 그 전설적인 물건이다.
당시 대여점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에 꽂혀 있었고, '비뢰도가 없는 대여점은 가게도 아니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시대를 풍미했던 베스트셀러였다.
마흔이 넘어 다시 펼친 이 책은 낯설었다. 비장한 복수나 협의를 논하는 정통 무협과 달리, 이곳은 시작부터 파격이다.
주인공 비류연은 지독한 괴짜 사부 밑에서 온갖 기행과 노역을 견디다 못해 세상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들어간 곳이 무림의 인재를 키운다는 '천무학관'이다. 도진은 넥타이를 매만지며 생각한다.
내가 매일 아침 지옥철에 몸을 싣고 향하는 이곳, 거대한 빌딩 숲이 바로 21세기의 천무학관이 아닐까 하고.
천무학관에는 '구룡칠봉'이라 불리는 선택받은 인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화려한 배경과 압도적인 무공(스펙)을 자랑하며, 학관의 미래를 짊어질 용과 봉황으로 추앙받는다.
회사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입사 때부터 남다른 고과를 받고, 임원들의 라인을 타고 승승장구하는 최연소 팀장들. 그들의 무공은 화려하고, 목소리는 당당하다.
그렇다면 도진은 무엇인가. 도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주작단'이라 정의한다. 이름은 거창한 사신 중 하나지만, [비뢰도] 속 주작단의 실체는 비류연의 전속 셔틀이자,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며 굴려지는 비운의 그룹이다.
"강 차장, 이것 좀 부탁해."
"강 차장, 이번 보고서 급한데 자네가 좀 맡지."
회사의 상사들은 도진을 주작단 부리듯 한다. 빛나는 성과는 구룡칠봉이 가져가고, 도진에게 떨어지는 건 묵묵히 처리해야 할 뒤치다꺼리뿐이다.
한때는 억울했다. 나도 천하제일을 꿈꾸던 후기지수였는데, 어쩌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되었나 싶어서.
하지만 도진은 책장을 넘기다 뜻밖의 위로를 발견한다. 주작단주 남궁상. 그는 비류연에게 지독하게 시달리고 굴려진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초고수의 살기마저 버텨내는 엄청난 맷집과 생존력을 갖게 된다.
강함이란 꼭 상대를 베어 넘기는 것만이 아니다. 비류연의 변덕 같은 회사의 횡포 속에서도 끝끝내 부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주작단, 아니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들이 익힌 '생활 무공'의 극의가 아닐까.
도진은 이제 화려한 구룡칠봉을 부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질긴 생명력으로 이 학관을 졸업할 때까지 살아남기로 한다.
비류연은 기이하다. 남들이 땀 흘려 검을 휘두를 때, 그는 허공에 매달린 실 한 가닥 위에서 낮잠을 잔다.
엽전 한 닢에 목숨을 걸고, 사소한 이익에 눈이 뒤집히는 속물처럼 군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배경 없는 놈', '게으른 놈'이라 착각하고 무시한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을 관통하는 '착각계'의 묘미다. 주인공은 평소엔 '뭐도 아닌 놈'처럼 군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그 헐렁해 보이던 놈이 단숨에 상황을 정리해 버린다.
도진은 이 대목에서 '외유내강'의 새로운 해석을 본다. 진짜 고수는 자신의 강함을 굳이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빡빡한 칼집은 뽑을 때 요란한 소리가 나지만, 고수의 칼집은 헐렁하다. 평소에는 그저 장식처럼 보이지만, 베어야 할 순간에는 소리 없이 빠져나와 상대를 벤다.
도진은 그동안 회사에서 너무 날을 세우고 살았다. 무능해 보일까 봐 전전긍긍했고, 작은 지적에도 자존심이 베인 듯 아파했다. 내면이 단단하지 못하니 자꾸만 밖으로 가시를 세워 방어하려 했던 것이다.
'비류연이 강한 건, 남들의 착각을 즐겼기 때문이다.'
도진은 오늘부터 자신의 책상 위에 보이지 않는 가면을 하나 올려두기로 했다. '성실하고 조금은 우둔한 강 차장'이라는 가면이다. 부당한 업무가 내려오면 비류연처럼 능청스럽게 웃어넘기고, 꽉 막힌 회의 시간에는 속으로 딴청을 피운다.
사내 정보를 쥐고 흔드는 '애소저회' 같은 동료들과 섞여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이제는 피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허허실실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차갑게 상황을 계산한다.
"강 차장, 요즘 좀 빠진 거 아니야?"
부장님의 핀잔에도 도진은 그저 사람 좋게 웃는다. '그러시든가요. 제 진짜 칼은 당신 같은 분에게 쓰려고 가는 게 아닙니다.'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 순간, 도진의 강호는 조금 더 편안해졌다. 껍데기가 가벼울수록 알맹이는 단단해지는 법이다.
도진이 [비뢰도]에서 가장 전율을 느낀 무공은 '풍신'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내공을 쏟아붓는 파괴의 기술이 아니다. 거대한 자연의 흐름을 마치 팽이치기하듯 툭, 툭 건드려 내 편으로 만드는 '조율의 무공'이다. 작가는 이를 두고 "작은 힘만으로 거대한 팽이를 계속 돌게 하는 채찍질"이라 묘사했다.
도진은 무릎을 쳤다. 이것이야말로 쥐꼬리만 한 월급과 앙상한 체력으로, '가정'이라는 거대한 팽이를 멈추지 않게 돌려야 하는 가장의 무공이 아닌가.
이번 주, 회사에는 태풍이 불었다. 대형 프로젝트가 엎어질 위기였다. 팀원들은 멘붕에 빠져 우왕좌왕했고, 책임 소재를 따지는 고성은 마천각의 살수처럼 날아들었다. 도진은 비류연을 떠올렸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엔 내공(권한)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풍신'이다.
도진은 흥분한 상사의 화를 정면으로 받지 않고 슬쩍 흘려냈다. 책임 회피에 급급한 유관 부서에는 윽박지르는 대신, 그들의 입장을 들어주는 척하며 슬쩍 내 일을 얹었다. 마치 팽이 채찍을 휘두르듯. 강하게 때릴 곳은 때리고, 풀어줄 곳은 풀어주며,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흐름이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게 만들었다.
결국 태풍은 지나갔고, 팽이는 쓰러지지 않았다. 아무도 도진이 그 흐름을 바꿨다는 걸 몰랐다. 그저 "운 좋게 해결됐네"라며 안도할 뿐. 도진은 소설 속 '신풍협'처럼 조용히 웃었다. 화산의 제자들을 구하고도 정체를 숨겼던 비류연처럼, 내가 했다고 소리치지 않아도 된다. 우리 팀이, 내 자리가 무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풍신의 대가는 혹독했다. 소설 속 비류연은 풍신을 쓰고 나면 기력 탈진으로 기절하듯 잠이 든다. 도진 역시 금요일 밤, 현관문을 열자마자 방전되었다.
"아빠, 또 자?"
딸아이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멀어진다. 미안하다, 서윤아. 아빠가 오늘 너희들의 평온한 주말을 지키기 위해, 회사라는 십만대산에서 풍신을 너무 크게 썼구나.
소파에 널브러진 도진의 모습은 영락없는 패잔병 같지만, 그는 꿈속에서 '뇌신' 못지않은 코골이로 집안을 울린다. 비류연이 깨달은 뇌신의 경지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격 수준이었다면, 도진의 코골이 역시 거실을 진동시키는 위용을 자랑한다.
가족들은 모른다. 이 초라한 낮잠이, 사실은 거대한 폭풍을 막아낸 영웅의 달콤한 기절이라는 것을. 남들이 보기엔 그저 게으른 주말의 아저씨겠지만, 그는 지금 치열했던 전투를 끝내고 내공을 회복하는 중이다.
도진은 일요일 저녁,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비뢰도]는 분명 가벼운 소설이다. 문장은 투박하고, 개그는 유치하며, 이야기는 산으로 간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도진에게 이 책은 그 어떤 경전보다 무거운 깨달음을 주었다.
세상이란 거대한 학관에서 살아남는 법. 너무 모범생이 되려 애쓰지 말 것. 가끔은 뻔뻔한 괴짜가 되어 미친 수련을 견딜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강해질 것.
도진은 내일 다시 천무학관으로 출근한다. 여전히 구룡칠봉은 잘나갈 것이고, 주작단은 구를 것이다. 하지만 도진의 발걸음은 예전보다 가벼울 것이다. 그의 가슴 속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급, '헐렁한 여유'가 들어있으니까.
겉은 물러 보일지라도, 속에는 결코 부러지지 않는 심지 하나를 품은 채. 오늘도 도진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푼다. 비류연이 실 위에서 낮잠을 청하듯, 이 소란스러운 전쟁터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고요한 평정을 찾는다.
강도진의 논어 03
“내공은 과시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순간에만 쓰인다.”
"노트 귀퉁이에 차마 적지 못한 내 시린 밤의 기록들이 거기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마지막 계절이 지나 당신이 있었다] 첫 회부터 정주행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