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계절
도진은 낡은 책장 사이에서 [궁귀검신]을 꺼내 들었다. 이 소설의 시작은 언제 봐도 기이하다. 주인공 을지소문은 장백산의 괴짜 할아버지 밑에서 지옥 같은 수련을 견디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할아버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손자는 늘 부족한 줄만 알고 자랐다.
도진은 그 설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현실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도 내게 같은 거짓말을 해온 것은 아닐까.
너는 약하다.
너는 그저 월급쟁이다.
너는 이미 한 번 무너진 사람이다.
하지만 도진은 이제 안다.
수십 년간 이어온 굴욕과 버팀의 시간은 그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게으름 피우는 손자를 강제로 출도시키기 위해 “사천당가에 예쁜 정혼녀가 있다”는 거짓말을 지어낸다. 그 거짓말은 을지소문을 강호로 밀어냈고, 그는 활을 들었다.
검과 도가 난무하는 강호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상황을 끝내는 무인이다. 요란하지 않다. 그저 사거리를 계산하고, 시위를 당기고, 놓는다.
도진은 생각한다. 회사라는 천무학관에서 나의 활은 무엇인가.
유연함. 침묵.
그리고 이제야 깨닫는다.
‘전체를 보는 시야.’
전투가 벌어지면 높은 곳을 점거하고 활시위를 당기는 을지소문처럼, 도진은 사무실의 소란 속에서도 한 발짝 물러나 흐름을 읽는다.
지난 수요일의 회의실. 팀장은 도진의 기획을 자신의 것인 양 포장하며 기세를 올렸다. 평소와 같았으면 오해를 입고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도진은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낮고 정중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팀장님, 지난번 수정안의 핵심 로직을 제가 공유해도 괜찮을까요?”
짧은 말. 하지만 그 한 마디가 회의의 흐름을 바꿨다.
도진은 누구도 다치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사거리를 확보했다.
그의 화살은 공격이 아니었다. 팀을 지키는 수호였다.
“내 사거리 안에서는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
을지소문의 이 말이 도진의 가슴에 박힌다.
무공은 제압이 아니라 보호를 위한 것이다.
강함은 지배가 아니라 평화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다.
하지만 을지소문의 강호는 혈투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장백산을 내려온 그 여정 끝에 그는 연인 ‘청하’를 만난다. 비극적이었지만, 그 사랑은 분명 그의 삶을 넓혔다.
도진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왔다.
“나에게 새로운 사랑이 가당키나 하겠어.”
한 번 무너진 집. 다시 세우는 기둥. 아이들.
그것만으로도 벅차다고.
그런 도진의 성벽에 균열을 낸 것은, 서점의 한 구석에서 마주친 서이수였다.
키즈카페와 책장 사이. 아이들 웃음 너머로 스쳤던 눈빛.
그리고 오늘, 편의점 벤치에 나란히 앉아 펼친 [궁귀검신].
"궁귀검신? 거기엔 또 어떤 가르침이 있어요?"
도진은 잠시 웃었다.
“활을 쏘는 이야기인데... 사실은 사거리를 지키는 이야기예요.”
서이수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럼 도진씨의 사거리는 어디까지예요?”
그 질문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한 번 계절을 잃어본 도진에게,
그동안의 사거리는 아이들을 지키는 최소한의 경계선이었다.
누구도 넘지 못하게 막아 세운 좁은 영토. 하지만 지금 그는 처음으로 생각한다.
혹시...
그 사거리 안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은 무너진 건물을 복구하는 일이 아니다. 폐허 옆에 새로운 나무를 심는 일이다.
도진은 전처와의 이혼 이후, 썩은 기둥을 부수고 새로운 기둥을 세우는 중이다.
그 기둥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신일지도 모른다.
을지소문이 세상의 모든 오해와 비극을 겪고도 끝내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듯,
도진은 이제 침묵을 넘어 '포용'으로 나아간다.
퇴근 후 다시 찾은 편의점에서, 도진은 가면 뒤에 숨지 않은 담백한 미소를 건넸다.
그의 강호에 불어온 뜻밖의 봄바람.
가족은 정면으로 막아서고,
세상 일은 흘려보내며,
새로운 인연은 조심스레 곁을 내준다.
도진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지만, 이제 그 고단함 속에는 계절의 기척이 섞여 있다.
증명은 타인의 눈에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사람들의 평온한 웃음, 그리고 조심스레 내민 손을 놓지 않는 용기에서 완성된다.
강도진의 논어 05
“진짜 고수는 영토를 넓히는 자가 아니라,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사거리를 확보한 자다. 그리고 그 평화 속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용기를 가진 자다.”
"노트 귀퉁이에 차마 적지 못한 내 시린 밤의 기록들이 거기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마지막 계절이 지나 당신이 있었다] 첫 회부터 정주행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