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을 버티는 사람
도진이 [북검전기]를 펼쳤을 때, 이야기는 이미 폐허 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북천문의 마지막 후계자 진무원에게 허락된 것은 복수의 칼날이 아니라, 사방을 둘러싼 감시자들의 눈이었다. 그는 검을 배워서도 안 되었고, 무공을 익혀서도 안 되었으며, 오직 무너진 성벽 아래에서 이름 없는 대장장이로 살아야 했다.
도진은 그 대목에서 오래 멈춘다.
아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당분간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현실.
이상하게도, 그 막막함이 위로가 되었다.
무협의 주인공들은 대개 기연을 만나 단숨에 강해지거나, 피맺힌 원수를 향해 광풍처럼 달려 나간다. 하지만 진무원은 달랐다. 그는 십 년을 견딘다. 쇳덩이를 두드리며, 벽에 새겨진 무공을 눈에 담고, 마음으로 베며,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을 통째로 삼킨다.
그의 강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아직 검을 들지 않는다.
도진은 책을 덮지 못한 채, 자신의 현실을 떠올린다.
집은 이미 한 번 무너졌고, 그는 썩은 기둥을 부수었다. 이제는 새로운 기둥을 세우는 중이다. 전처와의 일은 정리되었다. 다만, 그 자리에 생긴 공백이 아직 완전히 메워지지 않았을 뿐이다. 짧은 메시지 몇 줄이 관계의 전부다. 싸움은 끝났지만, 적막은 길다. 아이들은 여전히 서툰 아빠의 손길에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도진도, 아버지라는 자리에 다시 서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회사라는 천무학관의 공기는 여전히 숨 막히고, 상사의 말은 가끔씩 비수처럼 꽂힌다.
결심 하나로 세상이 뒤집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삶은 여전히 팍팍하고, 나는 여전히 약하다.
그러나 도진은 이제 안다. 강해진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을 나는 기술을 얻는 일이 아니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이 정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임을.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는 일. 그에게 그것은 가장 정갈한 출도의 의식이다.
진무원이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망치를 휘두르며 근골을 다졌듯, 도진은 매일 아침 넥타이를 조여 매며 무너진 일상의 전선으로 나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련이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성장이다.
매일 저녁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아이들의 이부자리를 펴주는 일. 그것이 도진에게는 소리 없는 검법의 초식이다.
밖에서는 바람이 되어 공격을 흘려보내고, 안에서는 방패가 되어 아이들의 잠을 지킨다.
가족은 정면으로 막아서고, 세상 일은 흘려보낸다. 참 고단한 일이다.
그 주 수요일, 회의실에서 작은 일이 있었다. 프로젝트의 핵심 방향이 수정되었고, 팀장은 마치 자신의 통찰처럼 말을 정리했다. 그 아이디어는 이틀 전, 도진이 야근하며 정리해 보낸 메일의 내용과 거의 같았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강 차장은 요즘 존재감이 좀 약하네?”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다. 회의실에는 웃음이 번졌다. 도진은 따라 웃었다. 정정하지 않았다. 메일을 꺼내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날 밤, 아이의 받아쓰기 공책에 동그라미를 그려주며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밖에서 증명하려다 안에서 무너질 필요는 없으니까.
회사에서 억울한 말을 듣고도 웃어넘기는 이유는 비굴해서가 아니다. 진무원이 십 년 동안 검을 들지 않았던 것처럼, 진짜 힘을 써야 할 때를 위해 세상의 오해를 기꺼이 입고 있을 뿐이다. 밖에서 부러져버리면, 안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요구하지만, 진짜 고수는 단 일 센티미터도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공백의 시간을 채워 넣는 사람이다.
도진은 묻는다. 강해진다는 건, 언제 증명되는가.
북검전기는 말한다. 증명되는 날이 오기 전까지, 묵묵히 버티는 그 뒷모습에서 이미 강함은 시작되었다고.
당장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일 아침 출근길은 오늘보다 더 고달플지도 모른다. 그래도 도진은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하게 신발 끈을 묶는다. 지루한 밥벌이와 굴욕적인 침묵, 그리고 아이들을 향한 서툰 헌신들이 모여 언젠가 하나의 성벽이 될 것을 믿으면서.
퇴근길, 현관문 앞에서 억울함의 외투를 벗는다. 밖에서 바람이 되어 흘려보냈던 모든 인내는, 이제 아이들의 웃음을 지키는 초석이 된다.
증명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래서 도진은 오늘도 묵묵히 버틴다.
강도진의 논어 04
“강함은 승리가 아니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시간을 버티는 힘이다.”
"노트 귀퉁이에 차마 적지 못한 내 시린 밤의 기록들이 거기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마지막 계절이 지나 당신이 있었다] 첫 회부터 정주행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