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묵향, 검을 거두는 사람

세상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법

by 아를밤

도진은 책장에서 조금 낡은 책을 꺼냈다. [묵향(墨香)]. 대여점 시절을 통과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밤을 새워 읽어봤을 이름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도진이 기억하는 건 단순했다. 압도적인 무공,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암살자,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고 조용하게 적을 베어버리는 검.

하지만 마흔이 넘어 다시 펼친 묵향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묵향은 강하다. 누구보다 강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강해진 뒤에 그는 무엇을 하는가. 묵향은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검을 들면 누구든 베어버릴 수 있지만, 그는 대부분의 싸움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싸워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묵향은 알고 있었다. 칼을 뽑는 순간 세상은 더 복잡해진다는 것을. 도진은 그 장면에서 오래 멈췄다. 강해진다는 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힘이라는 걸 말이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다. 억울한 일, 무시당하는 말, 남의 공을 가로채는 사람들. 예전의 도진이었다면 어떻게든 설명하고, 증명하고, 싸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안다. 모든 싸움이 싸울 가치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묵향이 검을 들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검은 정말 필요할 때만 쓰기 위해서다. 쓸데없는 싸움에 휘둘러버리면 정작 지켜야 할 순간에 무뎌진다. 도진은 생각한다. 내 검도 마찬가지라고.

회사에서의 자존심, 세상과의 작은 다툼들. 그 모든 것에 검을 쓰다 보면 정작 내가 지켜야 할 순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이들이 울 때, 내가 무너질 때, 내 사람이 흔들릴 때. 그때 필요한 건 아직 날이 살아 있는 검이다.


그래서 도진은 오늘도 검을 거둔다. 사람들은 그것을 침묵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무능이라 말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묵향도 그랬다. 세상은 고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고수는 굳이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퇴근길 엘리베이터 안. 누군가의 불평이 들리고 누군가의 웃음이 지나간다. 도진은 잠시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한때는 모든 싸움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얼굴. 지금은 조금 다르다.

모든 싸움을 이길 필요는 없다. 강한 사람은 싸움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도진은 책을 덮는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린다. 묵향이 그랬던 것처럼.

"아직 검을 뽑을 때가 아니라고."


강도진의 논어 06
“강함은 적을 베는 기술이 아니라, 베지 않아도 될 적을 가려내는 안목이다.”

42a24d5c-15f7-4adb-bd37-18b8e7624ade.png "아직은 아니다."

"노트 귀퉁이에 차마 적지 못한 내 시린 밤의 기록들이 거기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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