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간, 다른 계절
제주의 바람이 묻어있던 외투를 정리해 넣기도 전에 시간은 어느덧 4월의 한복판에 닿았다. 가장 큰 변화는 조용하던 스마트폰 단톡방에서 시작되었다. 도진의 어머니가 먼저 아이들의 사진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흔들린 구도 속에 담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일상의 정적을 깨울 때마다, 이수는 비로소 안도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운 봄날, 관계는 그렇게 조금씩 곁을 내어주고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 위로 새로운 화두가 던져진 건 첫 주말이었다. 제주 여행을 통해 이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힌 도진의 부모님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이미 한 번씩 무너져 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형식은, 그들에게 조금 피곤했다. 도진이 조심스럽게 이수에게 부모님의 뜻을 전했다.
“부모님이 이번엔 자기 부모님이랑 다 같이 펜션 여행을 한번 가면 어떻겠냐고 하시네. 격식 차리는 자리 말고, 그냥 다 같이 편하게 섞여보자고.”
도진의 부모님은 형식적인 공간에서 예우를 갖추기보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민낯을 확인하는 '동행' 을 선택한 것이었다. 반면, 이수의 부모님에게 '격식'이란 곧 '딸에 대한 예우'였다. 부모님은 도진 측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셨지만, 그 안에는 딸이 귀하게 여겨지길 바라는 단단한 마음이 서려 있었다. 이수와 도진은 그 미묘한 온도 차를 감당해야 하는 '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도진이 부모님 뜻이 그러시다면 이번엔 따르겠지만, 그래도 정식 인사는 꼭 드려야 하는 게 맞다.”
이수의 부모님에게 여행은 즐거움이기 전에, 서로의 세계가 공식적으로 맞물리는 엄중한 절차였다.
깊은 밤, 아이들을 재우고 나와 편의점 앞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캔커피의 온기가 피어올랐다.
"우리 엄마는 형식이 중요해. 그게 자식을 지키는 방식이라고 믿으시거든."
이수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형식보단 같이 있어보는 걸 택하신 것 같아. 한 번 넘어져 본 분들이라, 보여주는 모습보단 같이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더 믿으시는 거지."
두 사람은 싸우지 않았다. 상대를 설득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저 각자의 부모님이 가진 삶의 결을 있는 그대로 꺼내어 놓았을 뿐이다. 이수가 도진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가운데 서 있는 거네.”
“응. 근데 이번엔, 무겁지 않다.”
도진의 대답에 이수는 미소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양쪽 눈치를 보느라 숨이 막혔을 자리였지만, 지금은 서로를 믿는 마음이 지지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수와 도진은 밤늦게까지 머리를 맞댔다. 서로의 부모님이 살아온 궤적이 다른 만큼, 그 다름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중간에서 부지런히 마음을 날랐다. 형식을 두려워하는 도진의 부모님과, 절차를 통해 딸의 무게를 증명하고 싶은 이수의 부모님. 두 사람은 그 미묘한 온도 차를 인정하며 접점을 찾아 나갔다.
두 사람은 스마트폰을 들고 만남의 장소를 골랐다. 직선적인 동해나 마냥 따뜻하기만 한 남해보다는, 완만한 해안선과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깊이를 만드는 서해가 적당해 보였다. 도진은 스마트폰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 어때? 바다가 바로 앞이고, 정원도 예쁘네. 조용하고.”
이수는 화면 속 정원이 잘 가꿔진 리조트의 풍경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라면 양쪽모두 좋아하실거야.”
서해안 바다 옆, 조용하고 정원이 잘 가꾸어진 리조트.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어른들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는 곳으로 두 번째 여행지를 정했다. 이제 곧 서해의 노을 아래서 두 가족이 마주 앉을 것이다.
펜션은 서해안 바다를 내려다보는 낮은 언덕 위에 있었다.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고, 마당에는 작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도진의 부모님은 도착하기 전 근처 항구에 들러 회와 해산물, 그리고 소주를 사왔다.
“같이 먹어야 맛있지. 이런 데 오면 이런 게 제일이야.”
도진의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리조트 식탁 위에 바다를 깔았다. 제주 여행 이후 이수를 온전한 식구로 받아들이기로 한 마음이, 두툼하게 썰린 광어회와 멍게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뒤이어 도착한 이수의 부모님은 정갈하게 싼 가방에서 보온병 하나를 꺼냈다. 이수의 어머니가 새벽부터 정성껏 끓여온 된장국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속을 든든히 채워줄 따뜻한 온기. 이수의 부모님에게 식사란 격식을 갖춘 정성이자 예우였다.
식탁 위에는 바다의 차가운 향과 된장의 구수한 온기가 나란히 올랐다. 술잔이 놓인 자리 옆에 하얀 밥그릇이 놓였다. 같은 상이었지만, 거기엔 분명 다른 온도가 흐르고 있었다.
오후 세 시.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여섯 어른과 네 아이들이 한 상에 둘러앉았다. 지금 이 두 가족이 처한 상태와 같았다. 완전한 남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식구가 되기엔 아직 어색한 사이. 그 애매한 시간 속에 열 명의 사람이 마주 앉았다.
도진의 아버지가 먼저 잔을 들었다.
“한잔 하시죠.”
이수의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 잔을 받았다. 웃음은 작았고, 말수도 많지 않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그들의 방식은 '함께'라는 단어에 충실했다. 반면, 이수의 부모님은 조용히 밥을 떠 넣으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들은 평생을 아버지의 가죽공장과 어머니의 작은 식당이라는 폐쇄된 세계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타인과 어울려 떠들썩하게 여행해 본 적 없는 그들에게, 식탁 위를 가득 채운 소란은 낯선 문법이었다.
도진은 두 집의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부모는 함께 웃으며 시간을 쌓는 사람들이었고, 이수의 부모는 둘만의 고요로 세월을 견뎌온 사람들이었다.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 상에 앉혀두니 처음 보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이수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짧은 인사였다. 그 말에 도진의 어머니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희야말로, 된장국 덕분에 든든하게 먹었어요.”
그 사이에 놓인 공기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식사 후, 이수의 부모님은 둘만 조용히 산책을 나갔다. 손을 꼭 맞잡고 말없이 정원을 걷는 그들의 뒷모습은 평소 그들이 살아온 방식 그대로였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도진의 부모님 사이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 거실에 남은 도진의 부모님은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웃었다. 그러나 잠시 뒤, 어머니가 낮게 말했다.
“혹시 기분이 안 좋으신 건가? 우리가 너무 떠들었나?”
도진의 어머니는 비어있는 이수 부모님의 자리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시당했다고 느낀 건 아니었다. 다만, 함께 웃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들에게 '따로 걷는 뒷모습'은 낯설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다른 거지.”
그 말에는 판단도, 서운함도 없었다. 단지 낯섦이 묻어 있었다. 도진은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한쪽은 웃음으로 벽을 허무는 사람들이었고, 한쪽은 침묵으로 시간을 견뎌온 사람들이었다.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한자리에 앉혀두니 비로소 보이는 미세한 균열들. 다르다는 걸 안다는 것과, 그 다름을 견디는 건 다른 일이었다.
밤이 되자 펜션 창밖으로 잔잔한 서해의 물결이 보였다. 한 공간에 머물렀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밤이었다. 도진의 부모님은 거실에서 남은 맥주를 캔째 들이켜며 낮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수의 부모님은 일찍 방으로 들어가 창밖의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정적에 몸을 맡겼다.
도진은 마당에 잠시 서 있었다. 불빛이 켜진 창문 안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함께라는 말은 하나의 방식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었고, 누군가에겐 말없이 걷는 시간이었을 뿐. 그러나 오늘은 그 모든 시간이 같은 지붕 아래 놓여 있었다.
이수는 정원 마당에 홀로 서 있는 도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집안의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하루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무겁지 않았다. 함께여도, 각자의 방식으로 머무는 밤이었다.
서해의 만조와 간조가 소리 없이 자리를 바꾸듯, 두 가족의 계절도 그렇게 천천히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삶의 문법이 한 상 위에서 온도를 익힙니다. 억지로 섞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각자의 보폭으로 걷다 같은 노을을 마주하는 뒷모습, 그것으로 충분히 안온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