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물이 빠진 자리에서

닮지 않아도 같은 방향

by 아를밤

서해의 아침은 조용했다. 밤새 들리던 파도 소리가 한 걸음 물러나 있었고, 마당의 잔디 위에는 옅은 물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펜션 창문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스며들 무렵, 도진의 아버지가 먼저 목재 테크로 나왔다. 잠시 뒤,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이수의 아버지였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짧은 눈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발걸음은 비슷했지만, 보폭은 조금 달랐다. 한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평생을 부딪히며 걸어온 보폭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둘만의 공간에서 조심스레 삶을 지켜온 보폭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갈매기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도진의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죽공장을 오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수의 아버지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냥... 하다 보니 오래 했습니다.”

짧고 건조한 대답이었다. 그 말끝에 오래된 시간이 묻어 있었다. 도진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은 늘 사람의 얼굴을 읽으며 살았고, 한 사람은 말 없는 것들의 결을 만지며 살아왔다. 정반대의 삶이었지만, 무언가를 '오래 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묘하게 달라졌다.

“저는 늘 사람 속에서 일했습니다. 매일 다른 얼굴들, 다른 말들... 좋을 때도 있었지만, 지칠 때도 많았지요.”

도진의 아버지의 말에 이수의 아버지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수의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반대였네요. 그냥 말 없는 것들만 붙잡고 살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서해의 새벽, 도진의 아버지가 묵직한 한마디를 얹었다.

“그래도 그렇게 버텨온 게 대단한 겁니다. 혼자서 그 긴 시간을 견디는 게 더 힘든 법이니까요.”

비난도 평가도 아닌, 순수한 인정. 이수의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람 속에서 버텨온 것도... 쉽지 않으셨겠지요.”

그 말에는 비교도, 우열도 없었다. 다만 서로 다른 길을 인정하는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발걸음은 처음보다 조금 나란해져 있었다.


비슷한 시각, 리조트의 거실에도 따뜻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수의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곧이어 방에서 나온 도진의 어머니가 그 곁으로 다가왔다.

“커피 향이 참 좋네요. 어제 혹시... 불편하신 건 아니셨지요?”

도진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수의 어머니는 잠시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저희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늘 둘이서만 지내다 보니... 사람 많은 자리는 조금 서툴러요.”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공장도, 식당도... 늘 둘이었거든요. 손님은 많았지만, 결국 안쪽은 늘 둘뿐이었죠.”

도진의 어머니는 그 말에 담긴 이면의 마음을 읽어냈다. 어제저녁, 두 분이서만 말없이 산책을 나갔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무시나 불편함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편안한 '예의'였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전 평생 사람 속에 파묻혀 살았어요. 직장에서 늘 사람들 틈에 있었죠. 시끄럽고, 부딪히고."

도진의 어머니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

“어제 혹시 저희 때문에 불편하셨을까 봐 마음이 쓰였어요. 저희가 워낙 소란스러운 집안이라서요.”

이수의 어머니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저희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던 거지, 오히려 저희끼리 산책을 나간게 무례였을까 걱정이 되네요.”

도진의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다른 거지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서 낯섦과 오해는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서로의 방식이 다를 뿐, 자식을 아끼는 마음의 무게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두 아버지가 들어왔다.

“공기 좋네요.”

“예, 바다가 아주 조용합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어색함은 어제보다 옅었다. 식탁에 네 개의 커피잔이 놓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잔을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침묵은 더 이상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도진은 그 장면을 문틈 사이로 바라보았다. 어젯밤에는 각자의 방식이 부딪히는 듯 보였지만, 지금은 같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고 있었다. 이수도 그의 옆에 섰다.

“괜찮아 보이네.”

도진이 작게 웃었다.

“응. 완전하진 않지만... 같은 방향 같아.”

창밖으로 물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밤새 드러났던 갯벌 위로 서서히 바다가 차올랐다. 완전히 같은 모양이 될 수는 없어도, 같은 물이 그 자리를 덮어가고 있었다. 밤이 다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면, 아침은 그 다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닮지 않아도,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 여행의 가장 조용한 성과였다.


서로 다른 속도로 걸어온 발자국들이 젖은 길 위에서 비로소 나란히 포개집니다. 누구의 삶이 더 옳은지 묻지 않고, 그저 묵묵히 견뎌온 시간을 서로의 온기로 어루만질 뿐입니다. 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가 도착하려는 곳의 길이 하나일 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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