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거룩한 비움의 육면체!
1. 육면체라는 이름의 신전
인류사에서 가장 신성한 신전 중 하나로 손꼽히는 메카의 심장부에는 육면체를 뜻하는 알 카바(Al-Kaaba)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카바 신전은 검은 육면체의 구조물로서, 마스지드 알 하람(Masjid al-Haram) 사원의 드넓은 광장의 한복판에 자리하며, 그 이름대로 투박한 기하학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카바 신전의 카바(Kaaba)가 바로 현대 영어에서 육면체를 뜻하는 큐브(Cube)의 어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카바 신전은 거창한 신학적 의미를 담은 이름을 배제하고, 그 형태 자체인 육면체를 이름으로 삼은 신전으로서, 그 안에 깃든 “비움”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2. 우상 파괴와 원형 회복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카바 신전은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세우고, 대홍수 이후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재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현재의 카바 신전은 A.D. 608년에 메카의 지배 세력이었던 쿠라이시 부족에 의해서 건립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재건 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카바 신전은 한때 360여 개의 우상이 가득한 다신교의 중심지로 변모하기도 했습니다.
A.D. 630년에 무함마드는 지하드(성전)를 통해 승리자로서 메카에 입성하여, 이 수많은 우상들을 단숨에 타파했습니다. 즉,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을 특정 부족의 소유물이 아니라, 오직 유일신 알라만을 위한 신전으로 정화하였습니다. 이 카바 신전의 정화사건은 사람이 만든 가시적인 우상들을 걷어내고, 아브라함 시대의 순수한 원형으로 돌아간 거룩한 회복이었습니다.
3. 키스와에 숨겨진 민얼굴의 역설
카바 신전은 키스와(Kiswah)라 불리는 장엄한 검은 비단에 견고하게 감싸여 있습니다. 이 키스와는 검은 비단 위에 약 120kg에 달하는 순금 실로 쿠란의 여러 성구들을 정교하게 수놓아 만든 것으로서, 카바 신전을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거대한 함으로 보이게 합니다. 특히, 아라비아사막의 태양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의 문양을 머금은 이 키스와는 전 세계 이슬람 순례자들의 시선을 압도하며 거룩한 위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키스와 아래에 숨겨진 카바 신전의 민얼굴은 지극히 투박한 모습입니다. 즉, 통상적인 성전들이 최고급 대리석과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는 것과는 달리, 카바 신전은 메카 인근 산에서 채취한 거친 화강암과 현무암을 층층이 쌓아 올린 석조구조물입니다. 이처럼 화려한 키스와 뒤에 숨겨진 이 묵직한 돌벽은 역설적으로 이슬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카바 신전의 비움의 역설
사람들은 신전이라 하면 통상 그 안에 눈부시고 신비로운 신상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카바 신전 역시 그러하리라고 상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카바 신전의 내부는 놀라울 만큼 정갈한 비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단지, 카바 신전의 천장을 받치는 세 개의 나무 기둥과 쿠란의 성구를 정교하게 새긴 벽면의 아랍어 캘리그래피, 그리고 역대 개축에 기여한 이들이 헌정한 여러 등불만이 이 빈 공간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카바 신전의 비움은 유일신 알라를 비롯한 그 어떤 형상도 우상으로 두지 말라는 이슬람의 핵심 교리인 타우히드(Tawhid)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카바 신전의 가장 신성한 중심을 의도적으로 비워 놓음으로써, 신의 무한함을 드러내는 이 비움은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상 너머의 절대자에게 온전히 복종하게 하는 고도의 영적 장치라 하겠습니다.
5. 카바 신전은 지구의 배꼽
이슬람에서는 카바 신전을 지구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지구의 배꼽이라고 일컫고 있으며, 이곳에는 일 년 내내 전 세계 무슬림들의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례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 하나인 하즈에 근거한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서, 모든 무슬림은 평생 한 번은 반드시 지구의 배꼽을 밟아야 한다는 교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인종과 계급을 나타내는 옷을 벗고, 바느질조차 하지 않은 흰 천인 이흐람(Ihram)을 동일하게 몸에 두른 채 카바 신전을 반시계 방향으로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하는데, 이를 타와프(Tawaf)라 일컫습니다. 이러한 순례자들의 타와프의 물결이 지구의 배꼽을 향해 수렴하는 이 장관은 모든 사람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이슬람의 근본 교리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숭고한 의식이라 하겠습니다.
6. 키블라(Qibla)와 대원항로
전 세계 무슬림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예배를 드릴 때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야 한다는 쿠란의 교리에 따라 반드시 그 방향을 지켜야 하는데, 이를 가리켜 키블라(Qibla)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흔히 지도상의 임의의 한 지점에서 카바 신전을 잇는 직선방향이 곧 키블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방향은 실제 메카의 카바 신전을 가리키는 방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구는 지도처럼 평면이 아니라 곡면 구체이기 때문입니다. 부연하면, 지구의 곡면 구체에서 두 지점을 잇는 최단거리(곡선)의 방향은 평면 지도상의 동일한 두 지점을 잇는 최단거리(직선)와 그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구상의 어떤 지점에서 카바 신전을 잇는 최단거리를 대원항로(Great Circle)라고 하는데, 이 방향이 바로 카바 신전을 가리키는 키블라라고 하겠습니다.
*) 카바 신전은 가로 11.03m, 세로 12.86m, 높이 13.10m 규모의 직육면체입니다. 특히, 카바 신전의 정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하자르 알 아스워드(Hajar al-Aswad)라 불리는 검은 돌은 이슬람의 도로원표(Kilometer Zero)이자 성물로서, 순례자들은 성스러운 기운을 받기 위해 이를 손으로 만지거나 입을 맞추는 의례를 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