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ck 암흑방에 빛이 스미도록

처절하게

by VetStella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결국,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어릴 적 부모님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에 푹 빠져서 마지막 대사를 듣고 '명대사야~'라고 말씀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꼬맹이 나는 이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태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패기 넘쳤던 아이는 영화의 맥락을 읽지 못하고 한 줄의 대사만을 주목했던 것이겠지.

많은 사람들이 왜 그 마지막 대사에 감동하는지 몰랐다.



요즘은 이 대사가 맴돈다. 원래 대사보다도 번역된 대사가 좋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의미는 작가의 의도된 뜻은 아닐지도 모른다. 작가는 더 함축된 의미로 쓴 거겠지만.

뭐가 됐건, 난 단순하니까.


내가 기댈 곳은 태양뿐이다.

tomorrow도 아니고, another day도 아니고, 막연한 희망도 아니고, 정말로 태양!

사람에게 기댈 수 없다면,


라이트 테라피(light therapy)도 있듯이 우울할 때는 아무 생각도 말고 무조건 나와서 걸으라고 하지 않나.






2월 초 유방암 수술로 동물병원의 주중 진료는 일시 중단했다.

대학병원은 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내 스케줄 따윈 고려할 수가 없었다. 유방외과, 정밀의료센터, 방사선종양학과, 영양학과별 통보식의 예약이 잡히면 '넵!'하고 가야 하기 때문에 주중에 내 진료는 빵꾸가 날 게 뻔했다.

사실 수술 후 한 1-2주 지나면 출근이 가능해 보였지만,

팔에 힘도 잘 주지 못하고, 어설프게 진료를 이어나가는 것이 보호자와의 신뢰와 동물병원 운영상 더 안 좋을 거 같았다.

주중 진료를 중단하고, 주말에만 기존의 진료를 이어가고 나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초진은 더 이상 받지 않았다.


평소에 바쁘게 움직이고, 전쟁터 같은 상황 중에 나누는 동료들과의 수다가 그립다. 나의 삶의 축은 전우애를 나누는 동료들과 아이가 전부였다.

그중에 한 기둥이 뽑혀나갔으니 우울감은 끝없이 깊어가고 길 잃은 방황이 시작되었다.

초라해진 모습으로 어딘가 기웃거리거나, 위로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매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짜피 나의 반응은 똑같을테니까. "괜찮아."


카톡의 프로필 사진을 내리고,

전공별, 세미나별, 직장별, 스터디별 나뉘어 있는 단톡방에는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나 하나 대답이 없다고, 1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방들이기도 하고.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암흑방에 날 가두었다.






휴직 전 본능적으로 침잠을 예상했다.

사람들에게는 태연하게, "괜찮아. 이 참에 쉬는 거지." 하면서.

한번 침잠하면 다시 올라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한 3-4년?

아이가 없을 때야 늪에 허우적거리며 아프고 방황할 자유라도 있었지.

엄마가 한 마디 남긴다.

"너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거야."


어떻게든 낭떠러지에 그물막 장치라도 해놔야 했다. 이중, 삼중, 사중... 그만 추락해.



휴직 일주일 전 내 머릿속에 고여있는 감정을 정리할 글쓰기를 결심했고,

아이가 좋아하는 양말목공예로 바구니, 꽃, 냄비 받침, 고양이 장난감들을 만들며 단순 노동에 집중하고,


치료 기간 동안 자치구 여성인력개발센터나,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부동산 경매, 토지 경매, 미국 ETF, 공매 수업들을 보이는 대로 등록했다. 수시로 경매 법원 사이트에 들어가 관심 있는 물건들을 권리 분석하고, 시세 확인을 하면서 사람들은 얼마에 낙찰받는지 맞추기를 하며 내가 물건을 찾는 감이나, 권리 분석력을 체크해본다.


경매 법원 참관하러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선다. 법원 관계자는 입찰 봉투를 받아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마이크로 "입찰 실습으로 온 사람들은 보증금 없이 봉투를 제출하시면 방해죄로...."어쩌고저쩌고 경고 멘트를 남긴다. 내 뒤통수에 '초짜'라고 쓰여 있나 보다. 들켰다. 뭘 하든 어설프다.


집 앞 도서관에서 아이의 엉덩이 탐정 시리즈 책과 나의 수업 관련 책을 빌려 2주에 한 번씩이라도 밖으로 기어 나와 책을 반납하게 하고,

갓 초등학교 입학하여 적응하는 아이 등교를 함께하고.

아침에는 의무적으로 거실 블라인드를 올리고 햇살을 맞으며 따뜻한 차를 마셨다.

동굴 속에서 억지로 끌고 나와 어떻게든 태양을 맞도록 처절하게 세팅을 했다.

그래도 나락으로, 죽죽죽... 떨어진다.





2월 첫째 주 수술을 하고, 삼일째 두꺼운 거즈와 압박브라 착용을 하고 찬 바람이 들어올 틈도 없이 온몸을 꽁꽁 싸매고 수업을 들으러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방에는 수업 중에 마실 생강차와 핸드폰 알람이 울리면 복용할 타목시펜을 챙겼다.


휴직이 끝나고 돌아갈

톱니바퀴들만이 돌고 있는 암흑방을 깨뜨릴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다.

견고한 방에 조그마한 크랙이라도 만들면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을까?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내 톱니바퀴 시스템이 깨지기 시작하지 않을까.


이미 망치질은 시작되었다.

내가 선택해왔던 길이 정도(正道)라고 철저하게 믿었던 관점이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크랙 사이로 태양이 비출 때, 필요한 건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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