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은 어떻게 언어가 되었나?

【1부】남겨진 형태들

by 영옥

20년 전, 런던 브롬야드(Bromyard) 거리의 오래된 벽돌집 2층 방에 들어섰을 때의 생경함은 지금도 선명하다. 나에게 ‘방’이란 응당 네 개의 직선이 만나는 수직과 수평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방은 조금 달랐다. 창가를 품은 벽면 하나가 둥그렇게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이 네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꽤 낯선 충격이었다. 직선의 세계에 길들여졌던 나의 시선은 그 둥근 창가를 보며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직선의 세계’가 실은 인간이 선택한 수많은 언어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런던의 방에서 마주한 곡선이 자유로운 리듬이었다면, 내게 익숙했던 직선은 효율을 위해 정해 놓은 하나의 규격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기분 좋은 굴곡은 어느 건축가의 갑작스러운 변덕이 아니었다. 인류는 효율을 위해 직선의 질서를 만들면서도, 안식이 필요한 자리에는 늘 곡선의 예외를 남겨두었다. 중세 유럽, 건물 벽면의 일부를 움푹하게 파내어 침실나 서재로 쓰던 알코브(Alcove)가 대표적이다. 알코브는 사각형의 엄격한 규칙 안에서 인간의 곡선을 닮은 여백을 내어주던 방안의 작은 은신처였다. 직선이 공간의 효율을 말할 때, 곡선은 그 틈에서 삶의 여유와 안락을 지켜내는 것, 벽 안으로 아늑하게 파고든 알코브나 벽 밖으로 밀려 나간 런던의 창가나, 그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브롬야드 집001.jpg 종종 생쥐 한 마리가 방 안을 가로질러 전력 질주하던 그 방에, 나는 친구들이 보내온 손글씨 편지들을 책상 위에 세워 둔다. (24 Bromyard Avenue. 2006)
알코브002.jpg 알코브(Alcove) 건축 양식 (우. 출처: [건축용어해설] 알코브 (alcove) : 네이버 블로그)

이 경험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을 바라보면, 비로소 질서정연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상의 곧은 모서리, 가전제품 위로 일정하게 정렬된 작은 버튼들, 창문 너머 보이는 반듯한 도로의 실루엣까지. 대개 '단정하다'고 말하며 지나치는 이 간결한 형태들 속에는 사실 인류가 발견한 가장 지적인 언어가 숨어 있다. 바로 점과 선, 그리고 면이라는 추상의 질서다.


직선의 질서는 효율을 향한 약속인 동시에 세상을 명료하게 기록하려 했던 지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그 흔적은 우리 언어의 뿌리에서도 발견된다. 한글은 점(·)과 선(ㅡ, ㅣ)이라는 최소한의 기하학적 요소만으로 정교한 소리의 체계를 만들어 낸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선 인간이라는 본질을 분절하고 재구성한 일종의 ‘추상적 모듈’인 것이다. 런던의 방에서 마주한 곡선이 본능적인 편안함이었다면, 한글의 점과 선이 이루는 구성은 세상을 명료하게 기록하고 소통하려 했던 조상들의 지성적인 의지였을 것이다.


이 직선의 약속은 20세기 초 유럽 예술과 산업의 격변기를 거치며 현대 디자인의 토대가 되었다. 이전의 회화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몰두했다면,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지우고 그 자리에 점과 선이라는 조형의 기본 요소를 세웠다. 그는 사물의 외형을 묘사하는 대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그에게 점이 응축된 하나의 '멈춤'이라면, 선은 그 점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 '흔적'이었다. 사물을 점과 선이라는 최소 단위로 환원하여 바라보는 이러한 방식은, 이후 디자인이 복잡한 사회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보편적인 문법이 되었다.

칸딘스키와 훈민정음002.jpg 칸딘스키의 추상회화(좌)와 한글(우) (출처: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338076

이 추상의 약속을 현실의 골격으로 세운 이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였다. 그는 집을 지탱하던 두꺼운 벽을 걷어내고 기둥(점,혹은 선)과 바닥(면)만 남기는 도미노 시스템(Dom-ino System)을 제안했다. 수천 년간 건물을 짓눌러온 하중의 무게를 기둥에게 맡기고 벽과 바닥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준 이 간결한 설계는 '빌라 사보아'로 구현되었다. 비로소 창문은 가로로 길게 흐르는 '자유로운 선'이 되었고, 이때부터 건축은 유연한 평면을 얻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파트의 방 배치를 고민하고 거대한 통창으로 계절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100년 전 그가 세운 이 간결한 약속 덕분이다.


이 지성적인 약속은 파주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Mimesis Art Museum)'에서 가장 유려한 변주를 보여준다. 알바로 시자(Álvaro Siza)가 설계한 이 곳은 최소한의 기둥(점)으로 건물을 들어 올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빈 틈에 빛과 바람을 채웠다. 특히 백색 벽면이 그리는 유연한 곡선은 내가 런던의 방에서 목격했던 그 '자유로운 리듬'이 현대의 질서인 '면'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웅장한 표면으로 펼쳐낸다. 직선의 논리가 공간을 규정한다면, 그 위를 흐르는 곡선은 비로소 건축을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으로 완성하는 셈이다.

111111.jpg 출처: https://www.unjourdeplusaparis.com/en/paris-reportage/reconnaitre-immeuble-haussmannien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어져 오던 오스만 양식(Haussmann style)의 건물 벽은 지붕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진 내력벽이었다. 육중한 돌을 쌓아 올린 이 외벽은 건물을 지탱하느라 가로로 긴 창을 내어줄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세로로 좁게 난 창틈으로 조각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아야 했고, 방의 크기와 위치도 벽이 허락하는 경계 안에서만 결정되었다.

도미도 시스템001.jpg 1914년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도미노 시스템 투영도(좌)와 빌라 사보아(1928~1931)(우)
파주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_httpsmimesisartmuseum.co.krAbout.jpg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Mimesis Art Museum), 파주 (출처:httpsmimesisartmuseum.co.krAbout )


이어서 디자인은 인간의 몸과 가장 밀접한 가구로 시선을 돌렸다. 바우하우스 조형학교의 교수였던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는 어느 날 자전거 핸들의 매끄러운 곡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육중한 가죽 소파 대신 강철 파이프를 구부려 허공에 가느다란 '선'을 그었고, 그 선들 사이에 최소한의 '면'을 걸쳐 바실리 체어(Wassily Chair)를 완성했다. 당시 동료 교수였던 칸딘스키의 회화적 논리를 가구로 옮겨놓은 듯한 이 입체적인 선의 집합은 캔버스 위의 점과 선이 평면을 벗어나 인간의 무게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구조물이 된 전환점이었다. 전통적인 권위와 장식을 걷어낸 이 간결한 프레임은 현대 가구의 전형이 되었고, 우리는 비로소 덩어리가 아닌 선과 면 위에 앉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의자 비교001.jpg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아르누보 양식의 의자(좌)와 바실리 체어(1902)

이러한 약속은 손바닥 위 작은 물건들에도 해석이 필요 없는 질서를 부여한다. 브라운(Braun)의 디터 람스(Dieter Rams)는 칸딘스키가 정립한 조형 언어를 가전의 설계 원칙으로 계승했다. 그가 디자인한 제품에서 기능이 시작되는 지점은 분명한 '점(버튼)'으로, 제품의 전체적인 형태는 군더더기 없는 '선'과 '면'으로 존재한다. 필기구의 고전인 '라미(Lamy) 2000' 만년필 또한 마찬가지다. 잉크를 채우는 분할선은 매끄운 면 속에 숨어 있고, 손가락이 머물 자리는 완만한 곡률로 다듬어져 직관적으로 쥐는 법을 알려준다. 브라운의 가전이나 라미의 만년필처럼, 전원을 켜는 지점과 손이 머무는 자리가 형태 안에서 이미 정의되어 있기에, 우리는 별다른 설명서 없이도 사물의 쓰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결국 디자인이란 형태를 새로 발명하는 일이 아니다. 인류가 오래전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구조를 다시 불러오는 작업이다.


사람이 머무는 곳에 점을 찍고,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선을 긋던 그 명료한 감각을 되새기며. 새삼 주변의 사물이 건네는 담백한 안내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들은 화려한 수사 없이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과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가장 분명한 질서로 알려주고 있다.

라미002.jpg 바실리 체어에서 금속 스탠드의 논리를 가져온 브라운 L2(1958) 스피커(좌)와 Lamy 2000 만년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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