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남겨진 형태들
두 해를 넘겨 보지 못한 딸을 찾아, 홀로 런던으로 건너온 엄마의 무릎은 줄곧 말썽이었다.
자동차와 대중교통 이용이 자유로운 런던과 달리, 짧은 일정을 쪼개 엄마와 함께한 베네치아의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은 오로지 두 다리로 쉼 없이 딛고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조금 더 운치 있게 그 골목 골목을 누비고 싶었지만, 엄마의 아픈 무릎은 자꾸만 나의 신경을 발밑으로 잡아 이끈다.
그러나 이내 골목 끝을 지나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에 들어섰을 때, 눈 앞의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확장된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대리석 기둥들이 웅장한 도열로 맞이하고, 그 너머로 수평선과 맞닿은 시린 푸른빛 하늘이 쏟아져 들어온다. 사방을 감싸 안는 거대한 응접실을 마주한 듯한 그 평온은, 나도 엄마도 시린 무릎에 온통 쏠려 있던 골목의 기억을 단숨에 지워내고 활기찬 해방감을 넘어선 어떤 성스러움마저 선사한다. 날아드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어도 좋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광장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싱그러울테다. 훗날, 가장 좋았던 여행지를 묻는 말에 엄마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물이 있었던 곳, 그곳의 광장.”
이렇듯 잘 설계된 형태는 육체의 고단함마저 잠시 잊게 할 만큼 선명한 공간의 힘을 발휘한다.
디자인에서 형태란 결국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이다.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형태는 집요하게 묻고, 결정한다.
공간에 놓인 점 하나, 둘러진 선 하나에 따라 우리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때로는 형태가 그어놓은 궤적을 따라 누군가를 살피는 감시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군중 속에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공간의 형태를 조율한다는 건,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마주하게 할지 그 시선을 설계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군대의 직선적인 정렬이나 학교의 책상 배치를 떠올려 보자. 그 단호한 직선들 앞에 서면, 내가 품을 수 있는 생각의 폭마저 그 선의 모양을 닮아간다. 모든 시선이 오직 한 곳으로만 쏟아져 서로를 마주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구조 속에서, 사람의 온기보다는 집단의 효율이 먼저 느껴지는 이유다. 앞사람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게 하는 이 병렬의 정렬이 효율을 위해 형태를 깎아낸 결과라면, 원형(圓形)은 서로를 인지하고 이해하던 인류의 오랜 습성을 닮아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같은 원형이라도 그 중심에 무엇을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관이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원은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고, 어떤 원은 사람을 무력하게 얼어붙게 만들기에, 형태는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결정한다.
18세기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였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구상한 원형 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은 원이 지닌 가장 차가운 논리를 보여준다. 벤담에게 이 감옥은 최소한의 인원과 비용으로 수용자를 통제하고 교화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경제적인 형태여야 했기에, 이 설계자가 마주한 과제는 명확했다. 어떻게 하면 보이지 않는 시선만으로 인간의 의지를 굴복시킬 것인가.
그는 건물 중심에 높은 감시탑이라는 ‘절대적 점’을 찍고, 그 주변을 압도적인 수직 구조의 방들로 에워쌌다. 건물 원형을 따라 끝없이 반복되는 격자무늬의 방들이 개인의 삶을 획일화된 규격 속에 가두고, 중앙의 텅 빈 공간은 오직 감시자의 시선만이 통과하는 거대한 통로가 된다. 주변의 모든 시선을 감시탑이라는 한 점으로 강제로 묶어버린 이 비대칭적인 구조는 형태가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압도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단 한 명의 시선으로 수천 명을 압도하는 효율적인 통제 장치로서의 원. 그 정점의 끝에는 통제자라는 서늘한 권위가 서 있고, 형태는 그렇게 그 안에 머무는 이들의 비정한 위치를 단호하게 결정한다.
이와 반대로, 중심을 기꺼이 비워두기로 한 설계자의 결단은 때로 우리를 해방시킨다. 굳이 완벽한 원형의 틀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가 산 마르코 광장에서 느꼈던 그 막연한 안도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의 여느 원형 광장에서 마주하는 포용감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권위가 점유하던 중심을 비워내고 그 자리를 군중에게 내어줄 때, 공간은 비로소 우리를 가두는 벽이 아닌, 삶을 품어주는 배경이 된다. 어느 한 점이 시선을 독점하지 않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수평으로 눈을 맞추며 저마다의 자유로운 보폭을 그려나간다. 시선이 갇히지 않고 교차하며 흩어지는 이 방사형의 구조는, 형태가 어떻게 우리를 통제의 대상이 아닌 능동적인 주체로 머물게 하는지 일깨우는 질서일 것이다. 광장의 텅 빈 중심은 역설적으로 그곳을 걷고, 만나고, 담소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활기로 채워진다. 때로 가장 유효한 디자인이란 거창한 랜드마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중심을 비워냄으로써 사람들에게 공간을 점유할 권리를 돌려주는 데 있음을, 광장을 통해 깨닫는다.
이러한 형태적 사유는 원형 의회(Hemicycle)에 이르면 한층 더 정교하고 사려 깊은 질서가 된다. 의회의 좌석 배열은 왜 굳이 완만한 부채꼴이어야 했을까. 아마도 설계자는 서로 마주 보며 날을 세우는 직선의 대립 구조가 가진 공격성을 덜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의회 안의 모든 좌석을 중심으로부터 동일한 반경에 놓음으로써 발언의 무게가 직위가 아닌 목소리의 본질에 실리도록 유도한 섬세한 배려 말이다. 시선에서 막힌 곳 없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만든 이 곡선의 질서는 수직적인 위계를 걷어내고 수평의 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설계자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정점은 어느 한 명의 권력자가 아니라 그들이 나누는 대화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
영국 하원의 여야가 마주 보는 좌석은 중세 예배당의 구조를 이어받은 형식이자, 권력과 야당이 시선을 맞대는 영국식 정치 무대를 상징한다. 직선으로 맞선 좌석들은 두 세계를 뚜렷이 가르며, 정치가 본래 대립의 언어들이 공존하는 공간임을 말해준다. 반면, 부채꼴처럼 펼쳐진 유럽과 우리나라 의회장의 구조는 각 진영을 적이 아닌 동료로, 맞서는 존재가 아닌 공론하는 참여자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형식의 변주는 충돌보다는 공존을, 대립보다는 합의를 바라는 설계자의 세심한 의도가 스며 있다.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어도, 설계자의 치열한 고뇌는 우리 손바닥 위 얇은 유리판 아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초기의 스마트폰이 화면을 감싸는 금속의 틀, 베젤(Bezel)을 존재감 있게 드러냈다면 오늘날의 디자인은 그 미세한 선 하나를 깎아내기 위해 사활을 건다. 본래 화면을 보호하기 위해 자리한 이 가느다란 경계는 역설적으로 사용자의 시선을 가로막는 미묘한 벽이 되었다. Meizu 21은 그 한계를 1.74mm까지 줄이며 물질의 끝자락에서 사용자의 시선이 한층 더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여백을 연다. 극도로 얇아진 베젤과 매끄러운 곡률은 기기라는 존재의 흔적을 지워 사용자가 마침내 화면 너머의 세계, 순정한 정보 그 자체에 닿게 만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집요함 속에서 디자이너는 형태를 다듬는 사람이 아니라 ‘몰입’을 설계하는 조형가가 되는 것이다.
우리네 주거 구조의 변화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한국 주택의 전형은 거실과 주방을 벽으로 철저히 나누는 것이었다. 낮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거나 타일 벽만을 마주해야 했던 주방은 가사 노동의 공간으로 소외되었고 거실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가족의 시선을 한데 모으며 집안의 질서를 잡아주는 상징적인 정점이 되었다. 이렇듯 매체를 향해 일방향으로 고정되었던 시선의 질서는 이제 주방의 벽을 허물고 대면형 식탁이라는 새로운 중심의 구조로 옮겨가고 있다. 요리하는 사람의 시선이 벽이 아닌 가족을 향하게 하는 이 변화는 집의 주인공이 매체에서 구성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음을 말해준다.
어쩌면 디자인이란 형태를 빚는 기술이기 이전에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 설계자는 사라지고 시대는 변해도 그들이 남긴 형태는 당시의 삶이 지향했던 질서를 보여주는 선명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그 형태가 제안하는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오래전 설계자가 남긴 의도와 조우하곤 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형태의 정점은,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