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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Mar 12. 2022

17. 신애필의 죽음 (1)

  신애필(32세, 무직)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을 보기로 한 건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이다. 어느 날 그는 죽기로 마음먹었고 죽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까 싶어—죽어서까지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네이버에 검색해보려 했다. 타자로 ‘죽기’까지 쳤는데 자동완성으로 맨 위에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라는 문구가 떴다. 순간 호기심이 들어 그것을 클릭했다. 맨 위에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이라는 책이 떴다. 그것도 클릭했다. 책 소개를 훑었다. 예술적 수준과 대중적 평판을 검증받은 영화 1001편을 엄선했다고 쓰여 있었다. 이번에는 목차를 훑었다. 19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10년 간격으로 영화 제목이 나열되어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이걸 다 보고 죽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었다. ’이걸 다 보고 죽자!’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명색이 신애필인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정도는 보고 죽어야지.”

  그렇다. 그는 신애필이었다. 신애필이었지만 시네필은 아니었다. 신애필이었기에 시네필이 아니었다. 왜 그랬는지 잠시 그의 인생을 되감아 몇몇 순간을 살펴보자.

  그가 신애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영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신석기(58세, 석공업자)는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이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는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로 가던 버스 안에서까지 아들이 갖고 살아가게 될 이름을 고민했다. 자신이 이름 때문에 겪었던 수모를 떠올렸다. 중학교 1학년 때 반 친구가 그의 20점짜리 수학 시험지를 펄럭이며 “신석기는 이름이 신석기라서 머리도 돌대가리래요~”하고 놀렸던 기억. 그 말이 싫어 열심히 공부했지만 아무리 해도 50점 위로 오르지 않아 자기가 정말 돌대가리가 아닌지 괴로워했던 기억. 그 뒤로 국사시간에 신석기시대를 공부할 때마다 친구들이 그림을 가리키며 “석기야 네 친구들 나왔다”하고 놀림받았던 기억. 고등학교 때 방황 끝에 학교를 자퇴하고 ‘그래, 니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하며 무작정 석재공장에 들어갔던 기억.

  그렇게 15년을 일한 끝에 자신의 공장을 차려 ‘신석기석재공업 대표 신석기’라고 쓰인 명함을 손에 쥐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이 신석기라고 지어진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는 열심히 잘 살아왔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열등감이 있었다. 공부를 해 대학에 가서 소위 말하는 화이트칼라가 되지 못했다는 후회가 있었다. 물론 그는 웬만한 화이트칼라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열등감과 후회를 없앨 수 없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이름에 대한.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인생을 결정해버린 ‘신’, ‘석, ‘기’라는 이름 세 글자.

  아들에게만은 이런 운명을 짊어지게 할 수 없었다. 아들은 자기가 살지 못했던 삶을 살아야 했다. 열등감과 후회가 없는 삶. 화이트칼라의 삶. 동사무소에 도착한 그는 출생신고서 이름 란에 한 자 한 자 신중히 써내려갔다.

  ‘한글 (성) 신 / (이름) 애필

   한자 (성) 申 / (이름) 愛筆’

  사랑 애에 붓 필. 붓을 사랑하라. 신애필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영화산업은 한국에서 커지기 전이었고 그래서 시네필이라는 단어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그가 이름 때문에 놀림받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수업시간에 매번 PMP로 몰래 영화를 보다 들키곤 하는 친구였다. 어느 날 쉬는시간에 그 친구가 다가와 말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뭐가?”

  그가 말했다.

  “너는 신애필이잖아. 나는 시네필이 되고 싶거든.”

  “뭐……?”

  친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앞은 내 이름인데, 뒤는 뭐지?

  “내가 신애필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시네필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말하더니 친구는 제자리로 돌아가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고 왠지 모르게 기분도 나빠졌다. 그날 집에 돌아와 컴퓨터로 친구에게 들었던 단어를 검색했다. 신애핀, 시내피, 시네핑, 쉬네필…… 그러다 마침내 시네필을 검색했다. ‘시네필(Cinephile)은 영화 애호가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cinéma"(영화)와 "phil"("사랑한다"는 의미의 접미사)을 바탕으로 한 조어이다.*’ 그렇게 그는 시네필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그는 그 단어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그 단어가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이 단어를 가까이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이름 때문에 겪었던 수모와 살았던 삶. 영화를 가까이하면 언젠가 시네필 때문에 수모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어가 자신의 삶을 조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영화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즘엔 영화감상은 이미 대중적인 취미였지만 영화 정도 안 보고 살아도 지장은 없었다. 사실 완전히 지장이 없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영화의 명대사(“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올라와.”,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아직 한 발 남았다.”)를 몰라 소외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영화를 볼 때 자기는 몸이 안 좋다거나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빠지거나 수업 시간에 어쩌다 영화를 보면 반 친구들은 다 좋아하지만 혼자 시무룩해지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따져보면 모두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는 이름 때문에 별다른 곤란을 겪지 않고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가 이름 때문에 곤란을 겪은 건 그로부터 한참을 지나 26살 때였다. 그는 3년 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여자친구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들이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부터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시네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https://ko.wikipedia.org/wiki/시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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