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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Mar 25. 2022

17. 신애필의 죽음 (4)

  그는 인터넷에 ‘달나라 여행’이라고 검색했다. 마침 유튜브 동영상이 있었다. 15분 남짓한 짧은 길이였다. 그는 영상을 클릭했다.

  그 이후로 신애필은 하루 세 편씩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오래된 영화는 웬만해서는 유튜브에 한글이나 원문으로 검색하면 영상이 나왔다. 1940년대까지는 대부분 흑백영화였고 거기에 무성영화인 것도 많았다. 나온 지 백 년도 넘은 영화가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오늘날 자신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신애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화를 봤다. 왓챠, 넷플릭스를 구독했다. 그리고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과 충무로역에 있는 오!재미동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네이버 시리즈도 애용했고 가끔은 토렌트 불법 다운로드도 했다.

  1950년대로 접어들었을 때 모아뒀던 돈이 거의 다 떨어졌다. 계속 영화를 보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는 영화 보기를 잠시 멈추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집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거리도 가깝고 경험도 있겠다 지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지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 문자를 받았다.

  신애필은 그렇게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순전히 영화를 보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그는 문득 군대에서 전역하고 카페에서 처음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십 년 전에도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카페에서 일하고 있구나. 십 년이라는 세월이 아주 멀게, 또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그동안 나는 무얼 했을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신애필은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이랬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여덟 시부터 두 시까지 카페에서 일했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딴짓도 해가면서 두 편을 보면 저녁 일곱 시에서 여덟 시 사이가 됐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영화 한 편을 더 본 뒤 잠을 잤다. 일하고 밥 먹고 영화 보고 자기. 그의 하루는 이 네 가지 행위로 채워졌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어차피 영화 1001편을 모두 보고 나면 끝장이 나니 이것 말고는 신경 쓸 게 없었다. 여기엔 어떤 편안함이 있었다.

  신애필이 어쩌면 인생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건 그가 본 영화가 221편을 넘어서고부터였다. 영화감상이 그에게 삶에 대한 용기를 북돋았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삶이 있었고 그 숫자만큼의 좌절과 실패가 있었다. 그는 매일 세 번씩 타인의 삶을 들여다봤고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자신의 불행이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갈매기의 방향>이라는 영화는 그에게 큰 감동을 줬다.

  영화의 배경은 세계 1차 대전 직후 영국의 어느 마을이다. 주인공 T. P. 앤더슨은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이 전쟁에 가 있는 동안 아내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칠 년 전 딸의 죽음이 아직도 그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는데 이제 아내마저 떠나버린 것이다. 아내의 죽음이 몹시 슬펐지만 더욱 마음이 아팠던 건 그의 아내가 병을 앓고 있을 때 그가 전사한 줄 알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아내는 그가 죽은 줄 안 채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다. 하루하루 술에 빠져 산다. 그리고 술에 의지해서도 삶을 견디기 힘들어지자, 죽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밤 밧줄로 고리를 만들고 그 안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이제 밟고 있는 의자만 박차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딸과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삶에 미련이 남은 걸까?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자신마저 죽어버리면, 아내와 딸과 함께 했던 기억이, 그 행복했던 기억이 영원히 사라진다. 그는 그게 두렵다. 무(無)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그는 생각한다. 죽고 싶지 않아도 언젠가 죽게 될 것이고 그럼 아내와 딸을 만날 수 있다. 그럼 굳이 지금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해야 할 것은 그때에 이르기까지, 아내와 딸의 기억을 간직하며 열심히 사는 게 아닐까?

  그는 새출발을 위해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미국으로 가는 배 갑판 위에서, 푸른 하늘이 펼쳐진 바다 위에서 그는 갈매기 두 마리를 본다. 큰 갈매기와 작은 갈매기. 두 갈매기는 배가 가는 방향을 따라 나란히 날고 있다. 그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계속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아내와 딸이 아닐까? 그는 눈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갈매기는 방향을 틀어 선회한다. 곧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저 멀리, 광활한 대륙이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입국심사를 받는다. 심사원이 그에게 이름을 묻는다. “L. J. 앤더슨이오.” 그가 말한다. 심사원은 약자가 아닌 풀네임을 알려달라고 한다. “릴리 제인 앤더슨.” 그가 다시 말한다. “남자 치고 특이한 이름이군요.” 심사원은 이렇게 말한 뒤 서류를 전해준다. ‘심사 통과’라는 도장이 찍힌 서류를.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신애필은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특히 그가 탄 배와 갈매기 두 마리가 바다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장면을. 그 장면에는 슬픔이 있었고 그리움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는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좌절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그는 우선은 영화를 계속 보기로 했다. 1001편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늦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저녁을 먹고  편째 영화를 보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이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문득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남아 있는 맥주는 없었다. 사올까 말까 고민하다 그는  오기로 결정했다. 스페이스 바를 눌러 장면을 멈췄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대로로 나와 신호등 앞에 섰다. 건너편에 편의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초록불로 바뀌었고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운전자가 몰던 차가  부딪혔다. 그는 하늘로  떠올랐다.

  세상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머리로는 이 순간이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느끼는 시간은 매우 느렸다. 찰나였지만 자신의 전 생애처럼 길었다. 그는 이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생각.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맥주를 사러 가지 말아야 했어. 그냥 좀 참고 다 본 다음에 사러 갈걸. 아니면 그전에 이미 잘못됐었나? 내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을 보자고 마음먹은 순간에 이런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나? 어차피 나는 죽을 운명이었을까? 근데 뭔가 억울하다. 어차피 죽을 거였으면 죽기로 결심했을 때에 죽을 것이지 다시 살기로 마음먹은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근데 내가 왜 죽을 거라 생각하지.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몸이 어디 하나 불편해질지언정 죽지는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상하다. 과거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이런 경험을 하면 죽는 거랬는데. 역시 나는 죽을 것 같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어쩌면 지현을 만난 게 잘못이었을지도 몰라. 지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끝까지 영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럼 내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 그럼 그 카페에서 일하지 말아야 했을까? 근데 내가 시네필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건 한참 전이잖아. 그래, 중학교 때 그 자식이 나에게 다가와 부럽다고 말한 순간이 시작이야. 그 자식이 아니었으면 내가 시네필이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했을 거고 영화에 거리를 두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 녀석은 내가 단지 시네필과 비슷한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다가온 거잖아. 그걸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럼 내가 이 이름을 갖게 된 게 문제였을까? 아버지를 원망해야 할까? 근데 아버지도 이름 때문에 겪은 상처가 있어. 상처 때문에 내 이름을 지을 때 고민했고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지 않기 위해 이 이름을 지어준 거잖아. 아버지는 시네필이라는 단어는 그때도 물론이고 지금도 모를 거야. 그럼 도대체 누가 잘못이지? 뭐가 잘못된 거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알고 싶은데 시간이 별로 없다. 그냥 이 모든 게 다…… 좆같다!

  그는 목부터 바닥에 떨어졌고 세상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신애필이 674번째 영화를 본 날이었다. 777이나 1000이었으면 어떤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674는 별 의미 없는 숫자였다.


  신애필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아버지 신석기는 목놓아 소리쳤다.

  “아이고, 애필아…… 내가 네 이름을 그렇게 짓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이름을 그렇게 짓는 바람에…… 아들아, 내 아들 애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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