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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May 19. 2022

25. 토이 (3)

  4


  그녀는 아무 연락도 받지 않았다. 회사 동료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친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신고라도 하면 어쩌나 우려가 들었다. 병원이든 경찰서든 어딘가에 갔다간 배 안의 것을 들킬까 두려웠다. 그녀는 회사 동료와 친구에게 별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있을지도 몰라. 친구랑 만났던 그날인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야. 우리 둘이 마시다가 옆 테이블 남자 두 명과 합석을 했나?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너무 취했 때문일 거야. 그때 한 명과 원나잇을 한 건가? 그래서 임신이 된 건가? 하지만 그날 친구와 헤어지고 버스를 탔던 기억이 나는데. 집에 돌아와 토이를 만졌던 기억이 나는데.

  아니야. 지금 내가 왜 임신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말이 안 되잖아. 우연히 연속으로 돌팔이 두 명을 만났을 뿐이야. 테스트기도 정확하지 않다는 말이 많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가 없어. 임신했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그거야. 지금 내 뱃속엔 아무것도 없어. 나 혼자 망상을 한 것에 불과해. 상상으로 임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잖아. 그런 걸 거야.

  근데 왜 이리 불안하고 초조한 걸까.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무서운 걸까. 거짓인데도 왜 받아들일 수 없는 걸까. 나는 지금 문제가 있어. 매일 술을 마시고 잠을 못 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거야. 다시 정상적으로 생활하면 괜찮아질 거야.

  그녀는 진실과 거짓을, 사실과 허구를 수없이 오갔다.높은 확률의 희망과 낮은 확률의 절망을 오갔다. 높지만 발현되지 않은 희망과 낮지만 발현된 절망을 오갔다. 그녀는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망이 승리했다.


  그녀는 토이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 토이는 사료 냄새가 배어있는 빈 그릇을 혀로 핥았다. 사료 냄새가 모두 사라지고 침 냄새만 남게 되자 더이상 핥지 않았다. 빈 그릇 앞에 누워 낑낑 소리를 냈다. 그러다 빈 그릇을 앞발로 툭툭 쳤고 으르렁 소리를 냈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토이는 자신의 방석으로 가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다음 날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옆이 터진 사료 봉지를 발견했다. 쏟아진 알갱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누가 먹으랬어!”

  그녀가 소리쳤다. 놀란 토이는 안방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쫓아갔고 화장대 의자를 집어 내던졌다. 의자는 바닥에 튕겨 토이에게 부딪혔다. 토이는 깨갱 소리를 냈다.

  “다음에 또 먹으면” 그녀가 말했다. “죽여버릴 줄 알아.”

  그녀는 밖으로 나가 남은 사료를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바닥에 흩어진 것까지 싹싹 모아 버렸다. 토이는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며 방석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토이는 방석에 웅크렸다. 혀로 오른쪽 다리를 핥으며 끼잉 끼잉 소리를 냈다.


  개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마음 속에서 속삭였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척했고 모르는 척했다. 오히려 반박하려 했다. 그녀는 말했다. 그게 나쁜지 모르는 채 저질렀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는 없는 거야…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개는 그저 본능에 따랐을 뿐이야. 그걸 인도한 건 너라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본능에 따랐을 뿐이야. 둘 다 본능에 따랐을 뿐인데 왜 나만 고통받아야 하지?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야. 본능을 통제할 수 있어. 그녀가 말했다. 통제는 무슨. 내가 본능을 표출했다고 해서 그게 누구한테 피해를 줬어?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어. 근데 왜 통제해야 하지? 왜 고통받아야 하지? 목소리가 말했다. 아무도 너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어. 너는 네 의식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뿐이야. 그녀가 소리쳤다. 그게 문제야! 맞아.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은 없어. 하지만 고통을 주리라는 걸 알기에 고통스러운 거야. 온갖 멸시와 비난을 받을 걸 알기에 고통스러운 거야.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또 반박해봐. 반박해서 내가 잘못됐다고 말해봐.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어서 반박해보라니까. 내가 잘못됐다고 말해달라니까…….

 이따금 일말의 애정과 연민이 밑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그때마다 더욱 큰 증오로 그것들을 눌렀다. 내가 고통받고 있으니 너도 고통받아야 해.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하지만 애정과 연민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싱크대 옆에 있는 쓰레기봉투가 뜯긴 채 내용물이 바닥에 널브러진 광경을 봤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고 싱크대 서랍을 열어 칼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도망치는 토이를 쫓아가 몸을 깔고 앉았다. 토이는 그녀의 몸 밑에서 바둥거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칼 손잡이를 잡고 높이 치켜들었다.

  이제 내려찍기만 하면 되었을 때, 등 뒤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하얀 꼬리가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토이는 끼잉끼잉 소리를 내며 꼬리를 계속 흔들었다. 그 순간 거짓이지만 진실이라 믿어왔던 감정이 깨어졌다. 가슴께부터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녀는 칼을 내던졌다. 그 상태로 쓰러져 토이를 끌어안았다.

  “토이야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토이는 그녀의 얼굴을 핥았다. 혀에 눈물이 씻겨나갔고 금세 또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시 혀에 눈물이 씻겨나가고 또 눈물이 흘러나오고를 몇 번 반복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침과 눈물로 범벅됐다.



  5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진통이 시작됐다. 아래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렸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통증을 참아내며 바닥에 이불을 깔고 그 위에 신문지를 깔았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옆에 놨다. 그다음 깨끗하게 소독한 가위를 준비했다. 그녀는 옷을 벗은 채 바닥에 누웠다. 다리를 벌리고 심호흡을 했다. 토이는 불안하다는 듯 옆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괜찮아. 그녀가 말했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강하게 힘을 줬다. 어느 순간 물컹하고 미끌거리는 공 같은 것이 아래에서 쑤욱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래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사타구니에서 느껴졌다. 마침내 결심을 하고 허리를 들어 아래를 봤다. 그곳엔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덧 토이가 그쪽으로 가 그것을 혀로 핥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들어 가위를 집었고 그것과 자신 사이에 연결된 줄을 끊었다. 그것을 조심스레 손에 안고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그것은 두 발로 젖꼭지 언저리를 쿡쿡 눌렀다. 마침내 입에 물고 빨아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어떤 감정이, 이것을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이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토이가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덧 흰 털이 그것을 덮었다. 토이의 어릴 때 모습과 똑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개 두 마리를 키웠다. 모두 흰색 리트리버였다.

  그녀는 들을 사랑했다. 하나는 남편이라 불렀고 나머지 하나는 아들이라 불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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