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로 대화하는 법
[♪ 밝은 음악]
이지은: 안녕하세요, '안개 속을 걷다'의 이지은입니다! 오늘도 불확실성과 친해지는 시간, 함께해요!
어제 가족 단톡방이 완전 전쟁터가 됐어요. 다음 주 할머니 생신 모임을 어디서 할지 정하는데... 큰아버지는 "무조건 본가다!", 작은아버지는 "아니야, 이번엔 우리 집이야!", 고모는 "지은이네에서 만나자!"... 다들 본인 주장만 하다가 결국 감정싸움으로 번졌죠. [한숨]
그러다가 제가 "잠깐만요, 각자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유부터 들어봐요"라고 했더니... 분위기가 확 바뀌더라고요!
큰아버지는 할머니가 요즘 무릎이 안 좋으셔서 거동이 불편한 걸 곁에서 지켜보셨대요. 작은아버지는 지난번 다 같이 모였을 때 좁은 공간에서 조카들이 부딪혀 울고불고 난리 났던 기억이 남으셨고요. 고모는 여러 집 거리를 따져보니 우리 집이 가장 가깝다는 거예요. 아, 다들 각자 보고 들은 것이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띠링!]
어떠셨어요? 각자의 이유를 들어보면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거, 느껴지시죠? 하지만 이렇게 풀리기 전에 주장만 오가고 감정이 격해지는 장면을, 우리는 훨씬 자주 겪잖아요. 가족 모임에서든, 회사 회의에서든요.
여러 사람이 모여 뭔가를 결정할 때, 각자가 가진 증거와 근거를 어떻게 한자리에 올려놓고 따져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 '증거 중심 대화'에 대해 풀어볼 거예요. 여러 사람의 증거를 정리하고 따져보는 도구, 이런 대화가 실제로 굴러가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 조건을 갖추는 방법까지 단계별로 살펴봅니다.
자, 그럼 함께 알아볼까요?
집단에서 의견이 갈릴 때 우리는 종종 역설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분명 모두가 최선을 원하는데도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합리적이던 사람들도 감정적으로 변하며,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서로에 대한 서운함만 남게 되죠. 그런데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 보면, 의견 차이는 사실 귀중한 정보입니다. 서로가 다른 퍼즐 조각을 들고 있다는 신호니까요.
Ep.19에서 살펴본 베이지안 의사결정 프레임워크를 떠올려봅시다. 거기서는 의사결정을 네 단계(믿음, 예측, 가치, 비교)로 풀었죠. 의견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보려면 이를 두 가지 요소로 묶어보는 게 편합니다. 예측에는 믿음이 녹아 있고, 비교는 결국 가치를 견주는 단계니까요. 그래서 여기서는 선택 결과에 대한 예측과 선택 결과에 부여하는 가치(효용), 이 두 요소에 주목합니다. 의견 차이는 어느 쪽에서든 발생할 수 있어요.
선택 결과에 부여하는 가치는 주관적입니다. 논리적으로 '내 가치가 맞다'를 증명하기 어렵고, 누구에게나 통하는 객관적 기준을 세우기도 쉽지 않죠. 그래서 우리는 예측 차이를 좁히는 쪽에 집중합니다.
예측의 차이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옵니다. 각 개인은 저마다 다른 베이지안 모델(가설 확률 분포 + 가설을 데이터와 연결하는 데이터 모델)을 품고 있는 셈이에요. 이렇게 보면 개인마다 고려하는 가설이 다를 수도, 각 가설에 매긴 사전 확률이 다를 수도, 가설에서 데이터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한 데이터 모델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증거를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여기에 포함돼요. 거기에 각자가 관찰한 데이터, 즉 손에 쥔 증거까지 제각각이죠.
그래서 예측 차이를 좁히려면 각자의 증거를 꺼내놓고, 그 해석까지 함께 따져보는 게 효율적입니다. '내가 맞아'라는 주장을 '내가 본 증거는 이거야'로 바꾸면 대화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이런 전환은 협상 이론에서도 오래 다뤄진 통찰입니다. 예를 들어, 로저 피셔(Roger Fisher)와 윌리엄 유리(William Ury)는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에서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1].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기, 입장이 아닌 이익에 집중하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지를 함께 만들기, 그리고 객관적 기준을 고수하기. 이 마지막 원칙이 증거 중심 대화와 맞닿아 있어요. 감정이나 목소리 크기가 아니라, 누구나 검증할 수 있는 기준을 두고 이야기할 때 비로소 현명한 합의가 가능해집니다.
구체적인 예로 대학 수업에서 팀 프로젝트 주제를 정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세요. 다섯 명짜리 팀에서 후보가 좁혀져 두 주제가 남았어요. 민수는 AI 챗봇을 강하게 밀고, 다른 팀원들은 노인 복지 앱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각자 자기주장의 근거를 꺼내놓습니다. 민수는 "작년에 이 주제로 과제를 제출한 팀이 A+ 받았대"라며 선배들이 받은 성적을 강조해요. 지원이는 "근데 우리 팀에 AI 개발 경험 있는 사람이 민수밖에 없잖아"라며 팀 역량을 걱정합니다. 수진이는 "교수님이 이번 학기에 실용성을 평가 기준으로 강조하셨대"라며 수업 공지 스크린샷을 보여주죠.
같은 증거를 보고도 해석이 갈리는 장면도 나옵니다. 수진이가 보여준 '실용성 강조' 공지를 민수는 'AI 챗봇이 요즘 가장 핫하니까 실용성 기준에 딱이지'라고 읽지만, 지원이는 '실제 사용자에게 직접 쓸모 있는 건 노인 복지 앱 쪽이야'라고 해석해요. 베이지안 용어로 풀어보면, 두 사람은 같은 증거를 서로 다른 모델에 넣고 있는 셈이라, 같은 증거에 대한 데이터 지지도(관찰된 데이터가 각 가설을 지지하는 정도)가 서로 달라지는 거죠.
누가 맞고 틀렸을까요? 사실 모두가 나름의 타당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측면을 보고 있을 뿐이죠. 이제 필요한 건 각자가 꺼내놓은 증거를 함께 정리하고 따져보는 도구입니다.
CIA에서 근무한 분석 방법론 전문가 리처드 호이어(Richards Heuer)가 개발한 경쟁 가설 분석(Analysis of Competing Hypotheses)은 이런 증거 평가를 체계화한 방법입니다[2]. 증거-가설 행렬을 그려 어떤 증거가 어떤 가설을 반증하는지를 따지는 기법이에요. 여기서 '가설'은 그동안 우리가 배운 베이지안 추론에서의 '가설'과 같습니다. 직접 관찰할 수 없지만 여러 관찰을 설명할 수 있는 사실 주장이에요. 이 기법은 원래 개인 분석관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설계되었지만, 현재는 집단 의사결정에도 폭넓게 쓰이고 있습니다.
경쟁 가설 분석을 팀 프로젝트 사례에 적용해 봅시다. 이 사례에서는 다음 두 가설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H1: "AI 챗봇이 우리 팀에게 적합한 주제다"
H2: "노인 복지 앱이 우리 팀에게 적합한 주제다"
본래 경쟁 가설 분석에서는 (앞서 다룬 베이지안 추론에서처럼) 가능한 가설들을 빠짐없이 나열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교육적 목적으로 두 가지만 놓고 살펴볼게요. 이제 두 가설과 관련된 증거를 하나씩 나열하고, 각 증거가 각 가설과 일관적(+)인지, 비일관적(-)인지, 아니면 무관한지(0)를 표시합니다. 강도는 기호를 겹쳐(++, --) 나타낼 수 있어요.
기호를 표시할 때 모든 증거가 같은 무게를 갖지는 않는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해요. 직접 확인한 자료와 소문으로 들은 정보는 같은 +라도 힘이 다르죠. 실제 경쟁 가설 분석에서는 각 증거의 '신뢰도' 열을 따로 두어 출처의 무게를 별도로 관리합니다. 여기서는 단순화를 위해 +와 -에 이미 출처 신뢰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가정할게요. 같은 내용이라도 출처가 소문이라면 직접 확인한 자료보다 약한 기호를 받는다는 뜻이죠.
증거-가설 행렬을 실제로 채우려면 팀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같은 증거도 사람마다 다른 기호로 읽을 수 있거든요. 앞서 민수와 지원이 '실용성 강조'를 두고 해석이 갈렸던 것처럼요. 이 행렬을 함께 채운다는 건 이런 해석 차이를 대화로 맞춰가는 작업입니다. 끝까지 합의되지 않는 칸은 그대로 남겨둬도 좋아요. 어디서 의견이 갈라지는지 드러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정보니까요.
예를 들어, 두 번째 줄만 살펴보면: "팀원 중 AI 개발 경험자가 민수뿐"이라는 증거는 H1(AI 챗봇이 적합)이 참이라면 뜻밖의 관찰입니다(팀에 적합한 주제라면 보통 경험 있는 팀원이 더 있을 법하니까요). 반면 H2(노인 복지 앱이 적합)에는 이 증거가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AI 경험자가 적다는 사실이 노인 복지 앱이 우리 팀에 적합한지와 직접 관련이 없으니까요. 이 증거는 H1만 약화시키는 비일관 증거인 셈이죠.
같은 표 안에서도 증거마다 진단 가치(diagnostic value, 쉽게 말해 두 가설을 가르는 판별력)가 다릅니다. '교수님이 실용성을 평가 기준으로 강조'는 H1과 H2 양쪽에서 + 표시를 받죠. 양쪽 모두와 일관적이라 두 가설을 가르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됩니다. 반면 '노인 복지 공공 데이터가 풍부'는 H1에서 0, H2에서 ++ 이므로 두 가설을 확실히 가르죠. 경쟁 가설 분석에서는 이런 진단 가치가 높은 증거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경쟁 가설 분석의 핵심 원칙이 드러납니다. 내게 유리한 증거보다, 상대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 증거가 더 강력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 가설에 유리한 증거는 다른 가설들과도 양립 가능한 경우가 많아 판별력이 약할 수 있지만, 상대 가설과 일관되지 않는 증거는 그 가설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단서가 됩니다. 경쟁 가설 분석의 결론 원칙이 '가장 많이 지지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적게 반증된' 가설을 고르는 것도 같은 이유죠. 실제로 우리 표에서 H1에는 비일관 증거가 하나(AI 경험자 부족), H2에는 없습니다.
같은 표를 베이지안 관점에서 다시 읽어봅시다. 각 칸을 이 증거가 이 가설이 참일 때 얼마나 자연스럽게 관찰될 만한가, 즉 조건부 확률 P(증거 | 가설)로 해석하는 거예요. 앞의 행렬이 그대로 데이터 지지도 표가 됩니다.
표의 값은 기호 +/-/0의 크기를 확률로 옮긴 대략적 감각이에요. 절댓값보다 상대적 크기를 지지 강도의 눈금으로 읽으면 됩니다. 앞서 +와 -에 출처 신뢰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했으니, 이 확률에도 신뢰도가 녹아 있는 셈이죠.
이 표는 지금까지 본 데이터 모델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보통은 하나의 데이터 변수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값이 각 행에 들어가 열의 합이 100%가 되지만, 이 표에서는 각 행이 서로 다른 데이터 변수이고 실제로 관찰된 값만 모아놓았기 때문에 열의 합이 100%일 필요가 없어요. 대신 증거들이 서로 독립이라면, 각 열의 확률을 곱한 값이 그 가설이 참일 때 모든 데이터의 결합 확률이 됩니다. 참고로 로그(log)를 취하면 곱이 합이 되니(log(ab) = log(a) + log(b)), 경쟁 가설 분석에서 +/-를 합산하는 감각과 대응되죠.
앞서 많이 연습한 '역방향 읽기'도 여전히 유효해요. 관찰된 증거의 행 하나를 고정하고, 그 행의 값들을 가설들끼리 비교하면 그게 바로 데이터 지지도입니다. 방금 구한 각 열의 결합 확률도 같은 식으로 읽어요. 모든 관찰된 증거를 하나의 묶음 데이터로 보고 가설들끼리 그 값을 비교하면, 각 가설에 대한 종합 데이터 지지도가 됩니다.
경쟁 가설 분석과 베이지안 증거 평가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경쟁 가설 분석은 각 (증거, 가설) 쌍을 개별적으로 평가합니다. "이 증거가 이 가설과 맞는가?"를 가설마다 따로 묻죠. 반면 베이지안은 하나의 증거를 놓고 여러 가설을 나란히 비교합니다. 데이터 지지도는 한 행 안에서 가설들끼리 비교할 때만 의미를 갖습니다. 'H1에 대한 데이터 지지도가 높다'는 말은 'H2에 비해 높다'는 뜻이고, 가설을 가르는 데는 절댓값만 봐서는 판단할 수 없어요.
또 다른 차이는 증거에 부여하는 무게입니다. 경쟁 가설 분석은 '가장 적게 반증된 가설'을 고른다는 원칙 때문에, 비일관 증거(-)를 유독 중요하게 다룹니다. 반면 베이지안은 모든 증거의 데이터 지지도를 곱해서 결합하니, +이든 -든 한쪽을 특별히 우대하지 않죠.
두 방법은 각자 장점이 있습니다. 경쟁 가설 분석은 따라 하기 쉽고 직관적이에요. 각 증거에 대해 '맞나, 안 맞나'만 표시하면 되니 누구나 할 수 있죠. "불가능한 것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아무리 있음 직하지 않은 것이라도 남는 것이 진실이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셜록 홈즈의 추리법도 같은 발상을 공유합니다. 반증되는 가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거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가설도 완전히 반증되는 경우가 드물어요. 증거들은 여러 가설과 어느 정도씩 양립 가능하고, 판단은 그 정도 차이를 가늠하는 일입니다. 베이지안 접근법의 강점은 바로 이 미묘한 지형을 정량화하는 데 있어요. 가설들의 상대적 지지도 크기를 비교하고, 증거가 쌓이면서 그 비교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추적할 수 있으니까요. 이 책에서 우리가 주로 따라갈 방식은 베이지안이지만, 경쟁 가설 분석의 반증 지향 정신은 그 안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어떤 증거가 가설을 끌어내리는지 따져보는 것은 결국 그 가설의 데이터 지지도를 낮추는 증거를 찾는 일이니까요.
다만 이와 같은 증거 평가 도구를 팀에서 제대로 쓰려면 몇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해요. 증거는 대개 한 사람의 머릿속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건은 크게 두 가지, 분위기 문제와 구조 문제로 나뉩니다. 분위기 쪽은 비교적 오래 알려진 문제예요. 비판이 관계를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없으면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오가지 않습니다[3]. "네가 뭘 알아"가 아니라 "그 정보는 어디서 났어?"라고 물을 수 있는 환경이어야 감정싸움이 정보 교환으로 바뀌죠. 건설적인 의견 차이가 집단 사고의 질을 끌어올리는 자원으로 기능하려면 이 심리적 안전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4,5].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갖춰져도 구조적 문제가 남습니다. 심리학 연구는 집단이 이미 모두가 아는 정보에만 집중하고, 각자만 아는 고유한 증거는 잘 꺼내놓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걸 보여줘요. 이런 현상을 숨겨진 프로필(hidden profile) 효과라고 합니다[6]. 꺼내놓지 않은 증거는 증거-가설 행렬에 오르지도 못하니, 집단의 판단도 그만큼 도달할 수 있는 최선에서 멀어지죠. 그래서 각자가 본 것을 먼저 꺼내놓게 만드는 장치가 토론의 나머지 절반입니다.
그런 장치의 대표적 예가 델파이 기법(Delphi method)이에요[7]. 본래 델파이 기법은 1950~60년대 RAND 연구소에서 전문가들이 서로 대면하지 않고 장기 예측에 의견을 수렴하도록 설계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익명성과 반복적 피드백이라는 핵심 아이디어는 소규모 팀에도 빌려올 수 있습니다. 첫 라운드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의견과 근거를 제시합니다. 진행자가 이를 정리해서 모두에게 공유하면,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보고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기회를 갖습니다. 이 과정을 2-3회 반복하면 점차 의견이 수렴됩니다.
단, 수렴이 늘 더 나은 결론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합의도 가능하니, 수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서로의 근거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이 핵심입니다.
베이지안 관점에서 보면 델파이의 라운드 반복은 집단 차원의 순차적 베이지안 업데이트와 구조가 같습니다. 1라운드에서 각자는 자신의 사전 믿음에 본인 증거를 곱해 첫 사후 믿음을 만듭니다. 2라운드에서는 그 1차 사후 믿음이 새로운 "사전" 믿음이 되고, 타인이 꺼내놓은 근거와 의견이 새로운 "증거"로 들어와 2차 사후 믿음이 나옵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각자의 사후 믿음이 점차 공통의 지반에 가까워지죠. 델파이가 엄밀한 베이지안 절차는 아니지만, 그 골격은 이 수학적 업데이트의 사회적 근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 팀 프로젝트 사례에도 델파이 기법의 아이디어를 단순화해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주제가 두 개로 좁혀지기 전 단계로 되감아 봅시다. 민수가 'AI 챗봇이 최고야. 선배 팀이 A+ 받았잖아'라며 강하게 밀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다른 팀원들은 다른 생각이 있어도 말하기 어렵겠죠. 이때 구글 폼이나 네이버 폼으로 간단한 익명 설문을 만들어 각자 선호하는 주제와 이유를 제출하게 하면 어떨까요?
첫 라운드에서는 예상외의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AI 챗봇'은 민수 한 명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지속가능 패션'이나 '노인 복지 앱' 같은 전혀 다른 주제들을 제안할 수도 있죠. 각자 나름의 근거도 있을 겁니다. 지속가능 패션은 최근 트렌드라 자료가 많고, 노인 복지 앱은 사회적 가치가 크다는 이유 등이죠. 이 결과를 모두에게 공유하면 민수도 '아, 다들 다른 생각이 있었구나'라며 놀랄 것입니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는 각 주제의 장단점을 검토한 후 다시 의견을 내도록 합니다. 이 과정에서 'AI를 활용한 노인 복지 서비스' 같은 융합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 민수가 좋아하는 AI 기술도 살리고, 팀원들이 원하는 사회적 가치도 담은 절충안이죠. 이런 식으로 팀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주제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은 목소리 큰 사람이나 연장자의 영향력을 줄이고, 모든 의견이 동등하게 검토되도록 합니다. 특히 위계가 강한 조직에서는 익명성이 솔직한 의견 개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5명 남짓한 팀에서 완전한 익명성은 어렵습니다. 누가 어떤 주장을 평소에 해왔는지 서로 어느 정도 알 테니까요. 하지만 각자 의견을 따로 적은 뒤 한꺼번에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습니다. 처음 발언한 사람의 프레임에 나머지가 끌려가거나, 목소리 큰 사람이 토론의 방향을 선점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델파이 기법이든 익명 설문이든, 이런 도구를 사용해 각자의 증거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고 합시다. 여기서부터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먼저 공통분모를 찾아보세요. '우리 모두 프로젝트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잖아요? 이게 공유된 출발점입니다. 그다음엔 차이를 인정합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르구나.' 각자의 증거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어디서 믿음이 갈라지는지, 어떤 정보가 더 신뢰할 만한지, 어떤 관점이 빠졌는지 함께 검토합니다.
좀 더 넓게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집단 차원의 순차적 베이지안 업데이트를 실행하는 방법이었어요. 각자가 자신의 사전 믿음과 증거를 결합해 사후 믿음으로 업데이트하고, 그 사후 믿음을 꺼내놓습니다. 타인이 꺼내놓은 사후 믿음은 또 하나의 정보로 받아 자신의 믿음을 다시 업데이트하죠.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모두가 같은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상적인 조건에서는 의견 불일치가 이론적으로 지속될 수 없습니다. 게임이론가 로버트 아우만(Robert Aumann)은 두 합리적 사람이 같은 사전 믿음에서 출발해 서로의 결론을 완전히 알게 되면 사후 믿음이 결국 일치하게 된다는 것을 증명했어요[8]. 후속 연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정 조건 하에서는 추가 증거 교환 없이 서로의 현재 믿음을 반복해서 주고받기만 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걸 보였습니다[9].
현실은 이 이상적인 조건에 미치지 못합니다. 아우만의 결과는 두 사람의 사전 믿음이 애초에 같다는 강한 전제 위에 서 있어요. 실제로는 사전 믿음이 다르거나, 앞서 구분한 가치에 대한 불일치(효용의 차이)가 뿌리에 있을 때가 많고, 이럴 때는 증거를 아무리 나눠도 간극이 좁혀지지 않습니다.
합의에 도달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증거를 공유한다고 반드시 같은 결론에 닿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왜 다르게 보는가"는 이해하게 되죠. 그 이해가 집단 지성의 시작이고, 완전한 합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집단이 앞으로 나아가는 기반입니다.
시간도, 정보도, 에너지도 유한하니, 어떤 순간에는 합의 없이도 집단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증거 중심 대화로 합의에 도달하면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흩어진 의견을 하나의 결정으로 모으는 방법들이 있어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다수결도 그중 하나지만, 각자가 품은 확신의 정도까지 살리는 더 정교한 방법들도 있죠. 다음 시간에는 이렇게 의견을 종합하는 방법을 살펴봅니다.
이지은: 정리해 볼게요. '내가 맞다' 대신 '내가 본 증거는 이거야'로 바꾸는 것만으로 대화가 달라져요. 증거를 함께 정리하는 틀(경쟁 가설 분석과 베이지안 증거 평가)이 있고, 숨겨진 증거를 끌어내는 도구(델파이 기법)도 필요하죠. 혹시 합의에 닿지 못하더라도, '왜 다르게 보는지' 이해한 것만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띠링!]
오늘의 미션! 이번 주에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이렇게 해보세요:
"증거 카드 놓기" 대화법
"잠깐, 각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보자" 제안하기
각자의 증거나 경험을 하나씩 공유하기
상대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 증거부터 꺼내기
공통점부터 찾아서 합의 시작하기
특히 가족이나 친구와 의견이 다를 때 써보세요. '넌 틀렸어' 대신 '네가 본 증거는 뭐야?' 한마디만 바꿔보세요. 싸움이 퍼즐 맞추기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실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여러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방법을 살펴볼 거예요. 다수결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거든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저는 이지은이었습니다.
[♪ 밝은 음악]
참고문헌
1. Fisher, R., Ury, W., & Patton, B. (2014).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 (박영환, 이성대 역). 장락. (원서출판 2011)
2. Heuer, Jr., R. J. (1999). Psychology of intelligence analysis. Center for the Study of Intelligenc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3. Edmondson, A. C. (2019). 두려움 없는 조직 (최윤영 역). 다산북스. (원서출판 2018)
4. Page, S. E. (2007). The difference: How the power of diversity creates better groups, firms, schools, and societi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5. Nemeth, C. J. (2020). 반대의 놀라운 힘 (신솔잎 역). 청림출판. (원서출판 2018)
6. Stasser, G., & Titus, W. (2003). Hidden profiles: A brief history. Psychological Inquiry, 14(3-4), 304–313.
7. Linstone, H. A., & Turoff, M. (Eds.). (2002). The Delphi method: Techniques and applications. New Jersey Institute of Technology.
8. Aumann, R. J. (1976). Agreeing to disagree. The Annals of Statistics, 4(6), 1236–1239.
9. Geanakoplos, J. D., & Polemarchakis, H. M. (1982). We can't disagree forever. Journal of Economic Theory, 28(1), 19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