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 밤의 보석

달리는 꿈마차 12

by 신비

오늘은 빛이 닿지 않는 밤입니다.


신비는 식어버린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십니다.

쓴맛이 남는데 이상하게

아무 느낌도 남지 않습니다.

마음 항아리 앞에 섭니다.


오늘 보석은 가라앉아 있습니다.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올라오지 못합니다.
계속 아래로 눌려 있습니다.


신비는 손을 넣습니다.
손끝이 한 번에 닿지 않습니다.
여러 번 내려가야 합니다.


그 보석은 짙은 검은빛과 가라앉은 회색이
겹겹이 섞여 있습니다.


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깊은 곳에서 희미한 금빛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꺼진 것이 아니라 올라오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보석은 겹쳐진 삶의 무게에 눌려
깊이 가라앉아 있지만 완전히 꺼지지 않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의 보석입니다.



또각, 또각.


오늘 마음 정류소에는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서 있는데 서 있는 게 아닙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습니다.



꿈마차에 탑승하시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올라탑니다.

신비는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말이라도 하셔도 됩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있습니다.

한참 뒤에 입을 엽니다.



어릴 때는 집이 괜찮았습니다.
부족한 것 없이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집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회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부도가 났습니다.



그날 이후로
집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다른 여자를 만나고
집에 들어오면 화를 풀 곳을 집 안에서 찾았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 하나에도 몸이 먼저 굳었고
말 한마디에도 숨을 죽이게 됐습니다.



그렇게 집은 쉬는 곳이 아니라

버티는 곳이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안에서 자랐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일을 했습니다.
집에 보태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버텨야 했고
그게 제가 됐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기 전에
이미 버티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다르게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죽어라 일했습니다.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쉬지 않았습니다.
버텼고 견뎠고 계속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삶이 같은 자리에서
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결혼을 하고 나서는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암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다시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아내는 감사하게도 잘 회복 중입니다.



그리고 가족을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다시 버텨야 하는 삶이 시작됐습니다.
아내와 아이 셋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너질 수가 없습니다.
무너지면 끝나는 게 아니라 남겨집니다.



그래서 버티고 있습니다.



잘 아는데 그런데 이게 사는 건지 버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왜 힘든 일만 계속 일어나는지
벗어나지 못하는지



저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참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게 말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로또라도…”
“…한 번…”
“…됐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멈춥니다.



“…한 번만…”
“…다시…”



숨이 걸립니다.



“…시작하고 싶습니다…”


고개를 끝내 들지 않습니다.
마차 안이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신비는 그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바로 말을 잇지 않습니다.


그가 살아온 시간만큼
조용한 정적이 마차 안에 머뭅니다.


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엽니다.



힘드시죠.



그 말은 가볍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많이 삼켜왔고,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일 겁니다.



어릴 때는 버텨야 했고,
커서는 벗어나야 했고,
결혼하고 나서는 지켜야 했고,
지금은 무너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쉴 틈 없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잠시 멈춥니다.



이건 운이 나쁜 게 아니라
한 사람에게 겹쳐진 삶입니다.



당신은
어른이 된 게 아니라
어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지친 건 약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오래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무너지지 않은 게 아니라
무너질 시간을 이미 지나온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견디고 있는 사람입니다.



로또를 바라는 마음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도
도망이 아니라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리셋을 꿈꾸는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끝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자리입니다.



당신은
버티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낸 사람입니다.



당신이 버틴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낸 시간이었습니다.



아내분도 아이들도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남아준 사람으로
기억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겁니다.



잠시 멈춥니다.



당신의 인생에도 봄날은 옵니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오지 않는 날은 아닙니다.



지금을 버텨낸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시간이니까요.



그는 잠시 멈춰 서 있다가
천천히 발을 내딛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상황도 그대 로고 삶도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걸어갑니다.
조금 더 힘을 주고 조금 더 단단하게 걸어갑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신비는 조용히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도 잘 해내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가장 큰 로또일지도 모릅니다.



그날은 갑자기 오는 게 아니라

버텨온 시간 위에 천천히 올라오는 날입니다.



당신에게도 이유 없이

웃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겁니다.




또각, 또각.

꿈마차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집니다.




“꿈마차는 잠들지 못한 사람들을 태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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