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꿈마차 11
오늘은 조금 묵직한 밤입니다.
신비는
차가운 토마토 주스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십니다.
새콤한 맛이 입안에 남는데
이상하게 속은 더 가라앉습니다.
마음 항아리 앞에 섭니다.
오늘 보석은 유난히 조용합니다.
빛이 강하지도 않고 흐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가만히 남아 있습니다.
신비는 손을 넣습니다.
손끝에 닿는 순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천천히 올라옵니다.
그 보석은 늦게 꺼내진 마음들이
조용히 식지 않고 남아 있는
“늦게 도착한 마음의 보석”입니다.
또각, 또각.
오늘 마음 정류소에는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한 명은 허리가 조금 굽은 노인입니다.
다른 한 명은 단단해 보이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는 청년입니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습니다.
같은 자리에 서 있는데 각자의 밤 안에 있습니다.
신비가 말합니다.
“꿈마차에 탑승하시겠습니까.”
노인이 먼저 고개를 끄덕입니다.
“예.”
청년도 잠시 후 따라 탑니다.
마차 안이 조용히 흔들립니다.
노인이 먼저 말을 꺼냅니다.
“심심해서 잠이 안 와서…왔어요…”
말끝이 조금 흐려집니다.
“그런데 자네는 젊은 사람이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왔나…”
청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합니다.
“…아,네. 그냥…”
“저도 잠이 안 와서요…”
짧은 대답인데 더 이어지지 않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랬구만…”
잠시 청년을 바라보다가 묻습니다.
“…나이는 몇이요…”
“…아 저는 서른다섯입니다.”
노인의 눈이 조금 멈춥니다.
“…그래…?”
“…우리 아들이랑…”
“…나이가 똑같구나…”
그 말이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자네 직업은 뭔가.”
청년이 조금 늦게 답합니다.
“…저는 직장인 입니다.”
노인이 천천히 웃습니다.
“…아 우리 아들도 직장 다녀요.”
그 웃음은 길지 않습니다.
“…꿈이 있었는데,공부도 아주 잘했는데.”
잠시 멈춥니다.
“…내가
너무 못해줘서…미안해요…”
마차 안이 조용해집니다.
“…내가 조금만 뒷받침을 잘해줬더라면…”
“우리 아들은…
참 멋진 의사선생님 되었을 텐데…”
숨이 조금 흔들립니다.
“나는…그 흔한 목욕탕도 한 번 같이 안 가봤네…”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해준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
노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집니다.
“…참…”
“못 해줬어…”
“마음도 지원도…”
정적.
청년이 고개를 숙입니다.
어깨가 조금씩 흔들립니다.
소리를 참고 있는데 참아지지 않습니다.
눈물이 떨어집니다.
노인이 그걸 보고 묻습니다.
“…왜 우나…”
“…자네도 아버지가 잘 못해줬나…”
잠시 멈춥니다.
“그래도 다 사연이 있었겠지…”
“…그때는 그렇게밖에 못 했을 거야…”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집니다.
“…그래도 자네도 우리 아들도…”
“…참 멋지게 잘 커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정적.
“…젊음이…”
“…참… 좋은 것인데…”
청년은 더 이상 참지 못합니다.
숨이 무너집니다.
“…한 번도…”
“…저한테…”
“…잘 컸다고……”
“…말해준 적…”
“…없으셨잖아요…”
정적.
그 말은 작게 나왔지만
늦게 도착한 만큼 깊게 내려앉습니다.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내가…”
“…잘못했네…”
“…미안하네…”
그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합니다.
왜 미안한지 모른 채
그저 마음만 남은 것처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청년은
고개를 떨군 채 흐느끼며 말합니다.
“…감사해요…”
“…아버지…”
마차 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말 하나가 늦게 도착한 것처럼
남아 있습니다.
마차 안이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신비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엽니다.
기억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마음까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름은 잊어도 함께했던 시간은
다른 형태로 남습니다.
그래서 알아보지 못해도 낯설지 않은 마음이
남습니다.
잠시 멈춥니다.
어떤 사람은 기억을 잃고
어떤 사람은 그 기억을 끝까지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같은 시간인데도 무게가 다릅니다.
정적.
부모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남겨두고 떠나는 존재입니다.
말하지 못한 것,
해주지 못한 것,
그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서
그 말 한마디는 늦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늦게 도착할수록 더 깊게 남습니다.
말하지 못한 사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겨지는 것입니다.
잠시 멈춥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도착한 순간입니다.
늦게 전해진 마음일수록 더 오래 남습니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남습니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이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마차가 천천히 멈춥니다.
노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먼저 내립니다.
청년은 잠시 앉아 있다가 조용히 따라 내립니다.
그리고 노인의 어깨를 한 번 가볍게 잡습니다.
노인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청년도 아무 말하지 않습니다.
그걸 바라보며 신비는 조용히 말합니다.
이제야 알게 된 마음이라도 늦은 것은 아닙니다.
남아 있는 시간은 지워진 기억을 되돌리는 시간이 아니라 남아 있는 마음을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다시 해주는 것입니다.
또각, 또각.
꿈마차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집니다.
“꿈마차는 잠들지 못한 사람들을 태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