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꿈마차 15
오늘은 밤하늘이 유난히 맑습니다.
별이 많이 뜬 밤은
이상하게 더 쓸쓸합니다.
어두워서 슬픈 밤도 있지만,
너무 반짝여서 슬퍼지는 밤도 있습니다.
닿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비는
작은 유리잔에 담긴 물을 천천히 들어 올립니다.
아무 맛도 없는 물입니다.
맑고 투명한 물결이 잔 안에서 조용히 흔들립니다.
한 모금 머금어도 아무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더 마음에 남습니다.
그리움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사람 안에 고입니다.
신비는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탁자 위를 바라봅니다.
며칠 전
마주 신비에게 도착한 편지 한 통.
봉투는 소박했고 문장은 짧았습니다.
그러나 짧은 말이라고 해서 가볍지는 않습니다.
어떤 문장은
한 줄이어도 한 사람의 생애보다 무겁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보고 싶어.
그리고 너무 많이 사랑해.
며칠 뒤 보러 갈게.
넌 내 인생에 언제나
제일 빛나는 사람이야.
너는 내 햇살이야.
신비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쉽게 덮지 못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습니다.
짧은 문장인데도
읽을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신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음 항아리 앞에 섭니다.
오늘은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정확히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에게 가장 가까이 가보려는 밤입니다.
신비는 조심스럽게 마음 항아리에 손을 넣습니다.
손끝에 닿는 보석이 유난히 차갑습니다.
천천히 꺼내어 달빛 아래 펼쳐 보니
오늘 보석은 맑고 투명합니다.
빛이 없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안쪽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한 은빛이 숨 쉬듯 흔들립니다.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놓지 못하는 마음.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이름을 품고 있는 마음.
오늘 보석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이를 향한
그리움을 품은 보석입니다.
신비는 그 보석을 연료함에 조심스레 넣습니다.
달칵.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평소 같으면 작은 떨림과 함께
꿈마차가 숨을 고르듯 깨어났을 텐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고요합니다.
신비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마음 항아리로 손을 넣습니다.
보석 하나를 더 꺼냅니다.
좀 더 또렷한 빛을 품은 조각입니다.
이번엔 되려나 싶어 다시 연료함에 넣습니다.
달칵.
…
여전히 시동은 걸리지 않습니다.
꿈마차는 꼭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가만히 잠들어 있습니다.
신비는 한참 동안 마차를 바라봅니다.
억지로 깨울 수 없는 것이 세상엔 있습니다.
억지로 돌릴 수 없는 길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마 준이 작게 울음을 냅니다.
푸르릉.
준은 평소 같으면 신비의 말 한마디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가장 먼저 발을 내딛는 아이입니다.
신비는 주머니에서 당근 하나를 꺼내
준 앞에 내밉니다.
“준아.”
“가자.”
하지만
준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당근을 봐도 고개만 한번 기울일 뿐,
발굽은 제자리에 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신비는 조금 놀란 눈으로 준을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갑니다.
그리고 준의 이마를 조심스레 쓰다듬습니다.
달빛이 준의 속눈썹 위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오늘 밤 준은 마치 신비보다 먼저
그리움의 방향을 알고 있는 얼굴입니다.
신비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준아. 나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밤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다만…”
신비는 잠시 숨을 고릅니다.
“너무 보고 싶어.”
그 한마디가 너무 낮게 떨어져서
오히려 더 멀리 번집니다.
“나도 알아. 만날 수 없다는 거.”
“닿을 수 없다는 거.”
신비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준의 갈기를 쓸어내립니다.
“그래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름다운 별을 볼 수 있게 마지막 인사라도 건넬 수 있게 나를 데려다주면 안 될까.”
정적.
신비는 준의 목덜미에 이마를 살짝 기대며
작게 웃습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그 말 끝에 준이 천천히 신비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말없이 신비의 어깨에 얼굴을 비벼댑니다.
한 번.
또 한 번.
마치 알겠다고 말하듯.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신비는 눈을 감고 작게 웃습니다.
“우리 준 착하네. 고마워.”
연료함은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준은 조용히 발을 움직입니다.
또각.
또각.
꿈마차의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연료가 아니라
그리움이 길을 아는 밤입니다.
신비는 아무 연료도 없이 준이 이끄는 꿈 마차에
몸을 싣습니다.
또각, 또각.
꿈마차는 별빛 아래를 천천히 달려갑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길이 보이지 않는데도
준은 망설임이 없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인데 이미 여러 번 다녀온 길처럼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한참을 달리다 준이 걸음을 멈춥니다.
신비는 창밖을 내다보다 작게 묻습니다.
“여기야?”
준은 대답 대신 그 자리에 털썩 앉아
숨을 고릅니다.
후우—
후우—
길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쉽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 고개를 까딱입니다.
아직 아니라는 듯.
조금만 더 가자는 듯.
신비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습니다.
“그래. 가보자.”
또각, 또각.
마차는 다시 밤길을 달립니다.
은은한 안개가 바퀴 아래를 스치고,
달빛은 길 위에 길게 눕습니다.
몇 번의 쉼 끝에 준은 마침내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여 신비를 내려줍니다.
그곳은 신비도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입니다.
하늘과 아주 가까운 언덕.
손을 뻗으면 별 하나쯤 닿을 것만 같은 곳.
그 위로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신비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가슴이 아플 만큼.
신비는 천천히 주머니를 뒤져 당근 하나를 꺼냅니다.
준은 그제야 조용히 다가와 그 당근을 받아먹습니다.
아삭.
아삭.
그 소리가 작은 대답처럼 들립니다.
마치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야.
내가 데려온 곳은 여기야.라고
신비는 피식 웃으며
준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고마워.”
그리고
천천히 그 별 앞으로 걸어갑니다.
밤공기가 너무 조용해서자신의 숨소리마저
들릴 것 같습니다.
신비는 별을 올려다보며 작게 웃습니다.
“… 잘 갔니?”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립니다.
“너에게 인사를 못 해서 네가 보고 싶어 왔어.”
바람이 살짝 스쳐 갑니다.
“새로 이사 간 그곳은 어때?”
“자유롭니?”
신비의 눈가가 천천히 붉어집니다.
“…내가 너에게 인사도 못 했잖아.”
“…네가 한 말에 답도 못 하고…”
잠시 숨이 걸립니다.
“징그럽다고 한 말만 계속 생각나.”
신비는 눈을 감았다 뜹니다.
“나도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며칠 뒤 보러 오겠다던 너는 언젠가 꿈에 올 거지?”
그 문장 끝에
울음이 아주 조용히 스며듭니다.
신비는 작게 웃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혹시 정아. 내 동생은 만났어?”
희미한 웃음이 눈물 사이로 번집니다.
“학창 시절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사는 너를 보며 샤워하고 나온 널 보고 저 누나 진짜 쌍코피 터진다.”
“하던 그 애도 생각난다.”
그리움은
언제나 한 사람만 데려오지 않습니다.
한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과 함께 묶여 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따라옵니다.
신비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나는 아직…”
“…이별을 받아들이기엔…”
“…내 그릇이 너무 부족해.”
“…너희 잘 지냈으면 해.”
숨이 작게 떨립니다.
“늘 생각나고 늘 그립지만 조금 또 숨은 쉬어져.”
“그런데 한없이 무너질 땐 어쩔 수가 없어.”
눈물이 턱 끝에 맺힙니다.
“동생을 보내고 그리고 너를 보내고도 난 아직 준비가 안 되었나 봐.”
“괜찮아졌다고 말하기엔 너무 보고 싶고 죽을 만큼이라 하기엔 아주 조금 살 만해.”
신비는 울면서 웃습니다.
“그냥 나는 너희를 잊진 않을 거야.”
“…우리 서로 잘 살자.”
눈물이 조용히 떨어집니다.
“…그 말하러 왔어. 잘 지내.”
신비는 하늘을 향해 웃어 보입니다.
“…너네 둘은 참 반짝였고 아름다웠어.”
달빛 아래
그 말이 작게 흔들립니다.
“…사랑해.”
“…잊지 않을게.”
정적.
한참 동안 바람만 붑니다.
그 침묵은 차갑지 않습니다.
대답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들어준 것 같은 침묵입니다.
그때 뒤에서
준이 크게 울음을 냅니다.
푸르릉—!
신비가 돌아봅니다.
준은 눈물 흘리는 신비를 보며
발굽을 구릅니다.
한 번.
또 한 번.
마치
이제 그만 가자고.
이제 그만 울라고.
여기까지면 됐다고
말하는 것처럼 조금 성이 난 얼굴로
신비를 재촉합니다.
신비는 울다 말고 작게 웃습니다.
“…알겠어. 간다.”
꿈마차에 몸을 싣습니다.
그런데
준은 집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대신
더 깊은 밤을 향해 마차를 돌립니다.
별이 쏟아질 듯 내려앉은 길을 달리고,
은하수가 물처럼 흐르는 하늘 아래를 지나고,
반짝이는 호숫가를 따라 달리고, 꽃잎이 흩날리는 길을 천천히, 또 빠르게, 리듬을 바꾸어 달립니다.
마치
신비를 울게만 두고 싶지 않다는 듯.
마치 세상이 아직도 이토록 아름답다고
보여주고 싶은 듯.
마치
상실 다음에도 여전히 빛나는 것이
남아 있다는 걸 준만은 알고 있는 듯.
호수는 별빛을 담아 가만히 흔들리고,
꽃길은 지나가는 바퀴 소리에
향기를 풀어놓습니다.
신비는 창밖을 바라봅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숨을 못 쉬겠던 가슴이
조금씩 열립니다.
슬픔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움도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픔의 모양이 조금 달라집니다.
방금 전까지
몸을 짓누르던 돌 같았다면,
이제는 품에 안고 갈 수 있는 무게처럼
조금 달라집니다.
한참을 달린 뒤
마차는
천천히 멈춥니다.
신비는
가만히 내려 준에게 다가갑니다.
준의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작게 입을 맞춥니다.
“준. 수고했어.”
“고마워.”
준은 작게 코를 울립니다.
푸르릉.
꼭 별것 아니라는 듯,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신비는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봅니다.
별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습니다.
사라진 것은 없는데 같은 자리에 그대로 반짝이는데 이제야 조금 숨이 쉬어집니다.
신비는 희미하게 웃습니다.
이제 힘을 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또 마음 정류소에 가야 하니까요.
오늘도
누군가는 밤을 버티지 못해
마음을 안고 서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는
말 한마디 못 한 채
울음을 삼키고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는
가장 그리운 이름을 혼자 품고
잠들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요.
신비는
다시 꿈마차에 오릅니다.
준은 아무 말 없이
발을 내딛습니다.
또각.
또각.
상실을 안고도
다시 앞으로 가는 밤.
그리움을 품고도
다시 살아내는 밤.
어떤 사랑은 끝났는데도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떠났는데 사랑했던 마음은
떠날 곳을 잃고 가슴 안에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 뒤에도
계속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보지 못해도,
부르지 못해도,
닿지 못해도
마음은 끝내
사랑을 멈추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리움이란 잊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죽은 사람은
시간 속으로 사라져도, 남겨진 사람의 사랑은
사라질 곳을 찾지 못해 평생 마음 안을 떠돕니다.
그래서 어떤 이별은 잊는 것이 아니라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떠난 뒤에도
평생 가장 빛나는 존재로 남습니다.
신비는
창밖의 별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습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그리운 이름 하나를 품고
잠들지 못할 테니까요.
또각, 또각.
꿈마차는
조용히 마음 정류소를 향해 달려갑니다.
“꿈마차는 잠들지 못한 사람들을 태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