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꿈마차 14
오늘은 밤공기가 유난히 무겁습니다.
춥다고 하기엔 바람 한 점 없는데
이상하게 숨이 답답합니다.
신비는 작은 잔에 담긴 식혜를
천천히 들어 올립니다.
달큰한 향이 은은히 퍼지는데도
입안은 어쩐지 씁쓸합니다.
한 모금 머금고 잔을 내려놓은 신비는
천천히 마음 항아리 앞에 섭니다.
오늘 보석은 짙은 자줏빛입니다.
붉은빛도 아니고 보랏빛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탁하고 눌린 색입니다.
마치 삼키고 삼켜 끝내 속에서 곪아버린
마음 같습니다.
겉은 단단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쪽은 여기저기 금이 가 있습니다.
부서지지 않으려 억지로 버티고 있는
마음 같습니다.
그 보석은 가장 믿었던 이들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품은 보석입니다.
또각, 또각.
오늘 마음 정류소에는
한 여인이 서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울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더 아파 보입니다.
울음을 너무 오래 참아 이제는 눈물조차 마음대로 흐르지 않는 얼굴입니다.
“꿈마차에 탑승하시겠습니까.”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
마차에 오른 그녀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습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손끝만 계속 만지작거립니다.
신비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합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말이라도 하셔도 됩니다.
그 말이 허락처럼 들렸는지 여인의 눈가가
붉어집니다.
참아오던 숨을 천천히 내뱉습니다.
“저는 7남매 중 막내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요.
마흔 훌쩍 넘어 저를 낳으신 엄마였어요. 학교에 엄마가 오면 친구들이 너네 할머니 왔다고 놀렸어요.
작게 웃지만 눈은 젖어 있습니다.
“그 말이 참 싫었어요.”
그래도 저는 엄마 아버지 사랑 많이 받고 컸어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엄마가 아버지 몫까지 다 해주셨어요.
목소리가 잠시 따뜻해집니다.
그리고 형제들이랑 정말 우애 좋았어요.
정말… 좋았어요.
숨이 무너집니다.
저도 가정을 이루고 엄마가 되었어요.
근데 엄마가 일흔 넘으셨을 때 돌아가셨어요.
입술이 떨립니다.
저도 엄만데 엄마를 잃으니까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근데 엄마가 돌아가신 후 다 변했어요.
마차 안이 조용해집니다.
형제들이 변했어요.
저 남편이 구속이 너무 심했고 폭력 적이고
성격 차이도 심해서 이혼했어요.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살려고…”
“…한 이혼이었어요…”
손끝이 떨립니다.
근데 그 뒤부터 저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어요.
작은언니는 제 딸한테 너는 너희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했어요.
신비의 눈빛이 깊어집니다.
큰오빠네 조카 결혼식에도 오지 말라더라고요.
이혼한 사람 오면 부정 탄다고.
그냥 참고 살지.
왜 이혼했냐고.
목소리가 떨립니다.
무속인 하는 올케언니는 저더러 귀신 붙어서 정신 못 차린다고 했어요.
눈물이 떨어집니다.
필요할 땐 다 저 찾던 사람들이 제가 죽을 것 같아서 한 이혼 때문에 저를 버렸어요.
숨이 무너집니다.
그렇게 저도 한참을 연 끊고 살았어요.
근데 사촌 조카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제 아이가 옆에 있는데도 인사 똑바로 안 하냐고 타박하더라고요.
눈물이 차오릅니다.
“그래서 결혼식이 끝난 후 저 참다 참다 돌아가려는 그들에게 소리쳤어요.”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그랬더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안 되겠다…”
“…그러더라고요…”
숨이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저도 말했어요.
이제 우리는 남이라고.
고개를 떨굽니다.
집에 와서 펑펑 울었어요.
숨도 못 쉬게 울었어요.
큰언니랑은 왕래하고 있었거든요.
큰언니는 그 사람들과 달랐어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울음이 터집니다.
큰언니. 그 사람들이 왜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나 살고 싶어서 택한 이혼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거냐고.
목이 메입니다.
차라리 이혼 안 하고 죽었으면 다르게 봤을까라고요
정적.
저는 그들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이가 갈려요.
저는 뭘 잘못했을까요?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까요.
마차 안이 깊게 가라앉습니다.
신비는 그녀를 오래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작은 잔 하나에 식혜를 따라
조심스레 그녀 앞에 내려놓습니다.
잠깐만 식혜 한잔 해볼래요?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올립니다.
신비는 조용히 미소 짓습니다.
달아요.
조금은 마음이 나아질지도 몰라요.
여인이 작게 잔을 쥡니다.
신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합니다.
어디 가서 이런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듣는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짧은 한숨이 신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옵니다.
많이 외로우셨겠어요.
많이 억울하셨겠어요.
많이 서러우셨겠어요.
참아도 참아도 내 편 하나 없는 것 같아서
얼마나 무너지셨겠어요.
여인의 눈가가 다시 젖어듭니다.
신비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엽니다.
하지만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살기 위해 내린 선택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죽을 것 같아서 겨우 살아 나온 사람에게
왜 참지 못했냐고 묻는 건 그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당신을 탓하기 전에 당신을 품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동생이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버티다
그 선택을 했는지 먼저 안아주었어야 했습니다.
가족이라면 당신의 결정을 욕하거나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상처부터 보듬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당신이 얼마나 아팠는지는 보지 않고 이혼이라는 결과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낙인을 찍었습니다.
실패한 사람처럼, 잘못 살아온 사람처럼 당신을 몰아세웠습니다.
신비는 천천히 숨을 내쉽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의 사정도 모르고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건
그들이 미숙한 것입니다.
남의 아픔도 모르면서 쉽게 손가락질하는 건 옳아서가 아니라 생각이 짧은 것입니다.
여인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럼 제가 틀린 게 아닌 걸까요…”
신비는 작게 고개를 저어 보입니다.
그럼요.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가정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무너져가던 자신을 살려낸 사람입니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끝내 살아남은 것입니다. 무너진 것이 아니라
버텨낸 것입니다.
당신의 가치는 함부로 던져진 말 몇 마디로 정해질 만큼 가벼운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아파했고 충분히 버텼고 충분히 잘 살아낸 사람입니다.
여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신비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줍니다.
오래.
한참 뒤 울음이 잦아들고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아직 눈가는 붉지만 처음보다 조금은 숨을 쉽니다.
네. 이제는 정말 다 잊어야겠습니다.
마음이 후련 해졌어요.
감사해요.
그리고 돌아섭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신비는 조용히 말합니다.
가장 아픈 것은 모르는 사람의 욕이 아니라
믿었던 사람의 외면입니다. 그래서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더 오래 남고 더 깊게 박힙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함부로 대했다고 해서 당신의 가치까지 함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버렸다고 해서 당신이 버려질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 곁에 있었을 뿐입니다.
많이 울고 많이 아팠지만
끝내 살아낸 참 귀한 사람입니다.
남의 고통을 모른 채 쉽게 판단하는 사람은
결코 옳은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품어야 할 사람을 가장 먼저 내치는 사람은 가족의 이름을 가졌을 뿐, 가족의 마음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 하나를 살리지는 못할망정
상처 위에 돌을 더 얹는 사람이라면
그건 강한 것이 아니라 잔인한 것입니다.
또각, 또각.
꿈마차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집니다.
“꿈마차는 잠들지 못한 사람들을 태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