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시작
오대산 월정사에서 이틀을 묵은 적이 있다.
그때는 '산사의 하루'라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냥 산사에서 이리저리 혼자 지내면 되는 것이라 직장과 집에서 '나'를 찾기 힘들었던 시기에 '쉼'을 줄 수 있는 기회였다.
월정사 경내에 있는 숙소에서 그저 누워있다가 전나무 숲길을 걸었고 공양 시간에 맞춰 배를 채웠다. 물론 새벽 예불과 저녁 예불 시간을 지키라는 규칙이 있었지만 생소한 체험이라 그리 성가시지 않았다.
하룻밤을 자고 오대산 적멸보궁에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차로 가기보다는 계곡을 따라 걸었다. 혼자 걷는 길에서 밤사이 내린 비가 만들어 낸 계곡 물소리와 함께 머릿속이 씻겨 나가고 온몸이 가벼워지는 시간을 마주했다. 반나절쯤 걸어 도착한 적멸보궁.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적멸보궁 앞에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자리가 한없이 고요하고 마음의 분란을 사라지게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며 햇살 아래 잠시 머물렀다.
내가 삶에 지친 것은 내가 지칠 만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장과 집,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엄마... 그중 완벽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바빴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마음을 현실에 잡아두느라 늘 조바심이 났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틀어지는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견디던 시절.
그런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었다. 내색하지 않는 나에게, 사람들은 부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은 틀어진 일상을 들키지 않게 비틀거리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얽매이게 만들었다.
나를 비워야,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타인의 부러움이 나의 삶에 도대체 무엇이길래 가슴을 짓누르는 줄도 모르고 싸안고 살았는지.
하산하는 길에 상원사에 들렸다. 무언가 기대한 발길은 아니었다.
월정사를 출발할 때 보살님이 템플스테이 복장으로 상원사에 가면 공양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문득 기억이 나기도 해서였다. 나의 복장은 자유로운 차림이어서 그저 한 번 돌아보자는 마음이었다.
상원사 초입에서 희뿌연 김이 피어오르는 가마솥을 보았다.
초파일에 달아놓았을 연등을 앞에서 불을 지피고 가마솥을 걸어 공양을 준비하는 모습. 가마솥에 가득한 정성이 나를 흔들었다.
내 삶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두고 불을 지피고 싶었다.
그리고 나만의 향기 가득한 공양을 올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