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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원 Sep 28. 2018

문배술_배가 안 들어갔는데 배 맛이 난다?

“와, 이거 배로 만들었나 봐. 배 맛이 나는데? 그래서 이름이 문배술인가?”


문배술을 처음 마셔보고 향긋한 배 맛을 느꼈던 난, 그 뒤로도 한동안 문배술은 배로 만든 술이라고 생각했다. 하필 이름도 ‘문배’술이었으니, 내가 오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문배술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느냐가 뭐 그리 중요하리오. 문배술은 내가 본격적으로 전통주를 덕질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문배술이 내 첫 전통주가 된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강남을 배회하다 우연한 기회에 ‘전통주 갤러리’란 곳에 발길이 닿았다.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호기심 많았던 난, 갤러리의 문을 쓱 열고 들어갔다. 전통주를 살 생각은 없었다. 그냥 두리번거리다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근데 하필 그중에 가장 작고, 싸고, 도수 높은 게 눈에 띄었다. 가격은 단돈 만 원에 용량은 200mL, 도수는 40도. 그게 바로 나의 첫 전통주, 문배술이었다.


‘술 한 병에 만 원 정도는 괜찮잖아?’

적당히 도수 높고, 적당히 싸고, 적당히 예쁘게 생겨서 문배술을 한 병 사 들고 집에 왔다. 내가 전통주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이렇게 단순했다.



딱히 전통주에 대한, 문배술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뭐, 술이 술이지 특별한 거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집에 굴러다니던 샷 잔을 꺼내 정 넘치게 문배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여느 독주를 마실 때처럼 재빨리 목구멍으로 휙 하고 넘겼다.


“어라?!”

내 첫 반응이었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에 또다시 잔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번엔 맛을 좀 음미해보고자 천천히 들이켰다. 부드러웠다. 40도라는 도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글쎄, 내가 워낙 독주를 좋아해서 부드럽게 느꼈을 수 있다. 아니, 확실히 다른 독주들과 비교했을 때 그 부드러운 목 넘김은 월등했다.


보통 독주를 마실 때 예상되는 내 몸의 반응들이 있다. 일단 눈이 찡그려지고, 그 독함을 이기기 위해 ‘크’ 소리를 쓸데없이 크게 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하’ 소리를 크게 한 번 내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마신 독한 술, 그러니까 싸구려 위스키, 테킬라, 보드카 같은 술들을 마실 때면 그랬다. 지독함을 이기기 위해 술을 마신 뒤, 나름의 술풀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배술은 달랐다. 술을 목으로 넘기고 나서 미동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요거, 참 신기한 놈일세.’ 하는 표정과 함께 잔을 한 번 쳐다보고 ‘이거, 참 기특한 놈일세.’ 하며 병을 한 번 쳐다보게 됐다. 도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독한 술이라는, 기존의 싸구려 고정관념을 문배술이 깨줬다고나 할까.


마음가짐을 달리하고자 잔을 바꿨다. 언더락 잔에 얼음을 넣고 문배술을 따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듯 혀끝에 문배술이 맴돌게 했다. 보통 독주를 이렇게 마시긴 쉽지 않지만, 워낙 부드러운 녀석이라 이렇게 음미할 수 있었다.


일차적으론 복합적인 곡물의 맛이 풍부하게 혀끝을 맴돌았다. 내 풍부하지 못한 미각 때문에 정확히 무슨 맛이라고 표현할 순 없었지만, 구수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끝에는 달콤하고 향긋한 ‘배’맛이 나는 게 아닌가. “와, 이거 배로 만들었나 봐. 배 맛이 나는데? 그래서 이름이 문배술인가?”


그렇다. 이 전통주의 이름은 ‘문배’술이었다. 이름을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니 확실한 배 맛이 느껴졌다. 배의 맛이 지배적이진 않았지만, 곡물의 은은한 맛 속에 배의 향과 풍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참을 마시다 혼자서 문배술을 거의 다 비워갈 때쯤, 병의 뒷면에 있는 원재료명을 보게 됐다. 그리고 문배술에는 ‘배’가 전혀 들어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의 함량은 얼마나 들어갔는지 어느 지역의 배를 썼는지 궁금해서 여길 보고 저길 봤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배’라는 단어를 찾을 순 없었다. 원재료명에는 그저 조, 수수, 효모, 국, 정제수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싶어 포털 사이트를 열고 ‘문배술’을 검색했더니 나 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문배술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배가 들어가 있지 않지만, 배의 향이 나는 술”


그렇다. 이 전통주의 이름은 문배술이지만, 이 전통주에는 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이름을 문배술로 정했을까? 그 이유는 문배나무의 열매인 돌배의 향이 술에서 난다 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이 술에서 배의 향과 맛이 나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이 술을 만든 명인 이기춘 선생님을 찾아가 보시라고 말씀드려야겠다. 메조와 찰수수를 주원료로 사용해 그런 향과 맛이 나게 하는 비법은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닐 테니 말이다.


나를 전통주의 세계로 인도해 준 첫 전통주, 문배술. 그 역사를 찾아보니 역시 보통 술은 아니었다. 문배술은 고려 태조 왕건 시대부터 1000년이 넘게 이어져 온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 시대의 신하들은 왕에게 좋은 술을 진상하며 벼슬을 얻었는데, 그중 한 가문의 술이 바로 ‘문배술’이었다고. 왕에게 바쳐졌던 술이라니, 괜히 두 손 모아 공손하게 마셔야 할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문배술은 본래 북한 평안남도 지역의 술이었지만, 해방 이후 그 명맥이 끊겼다가 서울의 문배술 기능 보유자 4대손인 이기춘 명인에 의해 재현되어 1990년도에 상품화되었다고 한다. 


메조, 찰수수를 원료로 만든 증류식 소주이지만 그 속에 배의 향이 은은히 감도는 술. 중요무형문화재 제 86-가호,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 7호로 지정된 술. 무려 2000년, 2007년에 이어 2018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지정된 전통주. 문배술 되시겠다. 


문배술은 전통주 중에서도 유통이 굉장히 활발한 전통주이다. 현재 오프라인에선 롯데, 신세계 백화점 내의 우리술방, 이마트 등 대형 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놀라운 건, 작년 7월부터 정부에서 전통주의 온라인 유통을 허용해, 현재 온라인 포털사이트에 ‘문배술’을 검색하면 수많은 오픈 마켓에서 판매 중이라는 사실.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만으로 전통주를 손에 넣을 수 있으니, 필자가 느낀 신선한 충격을 함께 느끼고 싶은 독자들은 서두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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