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의 비창(悲愴),
그리고 영원

춤과 음악의 나라, 러시아

by 이헌철
image.png 차이콥스카의 비창교향곡@auctions.yahoo.co.jp/jp/auction/1071351280

1877년 7월 6일, 모스크바에서 37세의 차이콥스키가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안토니나 밀류코바이다. 그의 음악원 제자였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에게 열렬한 구애 편지를 보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청혼을 받아들였다. 왜?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차이콥스키는 무너졌다. 그는 추운 가을날 모스크바 강에 들어가 죽으려 했다. 폐렴에 걸려 죽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의 동생이 그를 모스크바에서 빼내 요양지로 보냈다.

결혼은 끝났다. 그들은 영영 헤어졌다. 차이콥스키는 신경쇠약으로 몇 달간 스위스에서 요양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썼다. “나는 내 자신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이 파국의 한가운데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image.png 1877년 여름,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나의 사진. [출처: 차이콥스키 리서치]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친구

1877년 가을, 차이콥스키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이었다. 철도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깊이 빠져 있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음악을 사랑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도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녀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연간 6,000루블의 후원금이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이제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오직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도 사임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절대 만나지 맙시다. 편지로만 교류합시다.” 차이콥스키는 동의했다. 두 사람은 14년간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단 한 번도 직접 만나지 않았다. 폰 메크 부인은 그에게 물질적 후원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을 주었다. 그녀에게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고뇌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당신은 제 유일한 친구입니다.” 그가 쓴 가장 위대한 작품들—교향곡 4번, 바이올린 협주곡,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은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러나 1890년, 폰 메크 부인은 갑자기 편지를 끊었다.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더 이상 후원할 수 없습니다.” 차이콥스키는 충격을 받았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유명 작곡가였고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상실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이해해 주는 친구였다.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이들은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의 성적 정체성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차이콥스키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그리워했다.

image.png 폰 메이크 부인


image.png 폰 메이크 부인의 편지(1876년12월 18일) @dzen.ru/a/Y16H4rzoOTY8uApu

예민함이라는 저주이자 축복

차이콥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예민했다.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표트르는 음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민감해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울어요.” 그 예민함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작은 비판에도 깊은 상처를 받았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했을 때, 루빈스타인은 혹평했다. “연주 불가능하다. 엉망이다.” 차이콥스키는 분노하며 외쳤다. “한 음도 고치지 않고 출판하겠다!”

그 곡은 훗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 협주곡이 되었다. 그는 지휘를 할 때도 떨었다. 무대 공포증이 심해서 지휘대에 서면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는 일기에 썼다. “내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말년에는 극복하고 유럽 순회 공연을 다녔다. 1891년에는 미국까지 가서 카네기홀 개관 기념 공연을 지휘했다. 그의 예민함은 저주였지만, 동시에 축복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인간 감정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그의 음악에는 슬픔, 기쁨, 절망, 희망, 이 모든 것이 있었다.


1893년, 마지막 교향곡

1893년 봄, 차이콥스키는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교향곡 6번이었다. 그는 동생에게 말했다. “이번 작품에는 내 모든 영혼을 쏟아부었어. 이것은 내가 쓴 가장 솔직한 작품이 될 거야.” 여름 내내 그는 이 곡에 매달렸다. 완성 후 그는 악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내 평생 이렇게 만족스러운 작품은 없었다.” 10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콥스키가 직접 지휘대에 올라 교향곡 6번을 초연했다. 그의 동생 모데스트가 물었다. “형, 이 곡의 제목은 뭐야?” 차이콥스키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비창(Pathétique)이라고 부르자.”

첫 악장이 시작되었다. 낮고 어두운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신음 같은 선율, 그것은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탄식 같았다. 음악은 점점 격렬해졌다가 다시 절망으로 가라앉았다.

3악장은 폭풍 같은 행진곡이었다. 승리처럼 들렸다. 관객들은 이것이 피날레라고 생각하고 박수를 쳤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지휘봉을 내리지 않았다.

4악장에는 모든 교향곡이 승리로 끝나던 시대에, 차이콥스키는 비통함으로 끝냈다. 현악기의 애절한 선율이 점점 사라져갔다. 마지막 음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것은 숨이 꺼지는 것 같았다. 죽어가는 것 같았다.

침묵이었다. 객석은 당황했다. 박수는 어색했다. 사람들은 무엇을 들은 건지 몰랐다. 차이콥스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젠가 이해할 거야.”


9일 후

11월 6일에 차이콥스키가 죽었다. 교향곡 6번 초연 후 겨우 9일 만이었다. 공식 발표는 콜레라였다.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셔서 감염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심했다. 콜레라는 격리가 필요한 질병인데, 그의 장례식에는 6만 여명이 모였다. 고위 성직자들이 미사를 집전했다. 음악계의 거물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소문이 돌았다. 자살이라는 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스스로 독극물을 마셨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명예 법정"에서 동성애 혐의로 자살을 강요당했다고 했다. 1979년 소련 당국이 그의 시신을 부검했을 때, 비소가 검출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교향곡 6번 '비창'은 그의 마지막 고백이었다. 한 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이 곡은 삶과의 이별을 노래하는 레퀴엠이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차이콥스키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자신을 숨겨야 했던 정체성, 실패한 결혼, 잃어버린 친구, 끊임없는 자기 의심,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바꾸었다.

《백조의 호수》의 비극적 사랑은 그 자신의 사랑의 불가능함이었다. 《호두까기 인형》의 순수한 꿈은 그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정열은 그의 억눌린 감정이었다. 그리고 '비창'은 그의 영혼 그 자체였다.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말했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선물했다." 20세기의 거장 스트라빈스키는 이렇게 평가했다. “차이콥스키는 우리 모두 중에서 가장 러시아적이었다. 그의 음악에는 러시아의 영혼—광활함, 슬픔, 열정, 그리고 희망-이 있다"

차이콥스키는 죽었지만, 그의 음악은 죽지 않았다. 오늘날 전 세계 어딘가에서 그의 음악이 연주되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호두까기 인형》이 울려 퍼진다. 발레단들은 《백조의 호수》로 생계를 유지한다. 피아니스트들은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경력을 시작한다.

그가 두려워했던 자신이 거부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기우였다. 사람들은 그의 멜로디와 그의 정직함과 그의 취약함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한국에서도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가장 사랑 받는 작곡가 중 하나다. 왜일까? 그의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우리도 슬프고, 외롭고, 사랑하고, 희망한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그런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오늘 밤, 비창을 들어보라

만약 당신이 한 번도 교향곡 6번 '비창'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오늘 밤 들어보라. 조용한 밤, 혼자 있을 때. 4악장의 마지막 선율이 사라져갈 때, 당신은 무언가를 느낄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지만, 아름다운 슬픔이다. 차이콥스키는 우리에게 슬픔도 괜찮고, 아픔도 인간의 일부고, 그리고 그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1893년 11월 6일에 한 작곡가가 죽었다. 그러나 그의 백조들은 여전히 춤추고, 그의 호두까기 인형은 여전히 꿈꾸며, 그의 비창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차이콥스키는 말했다. ”음악은 잠시나마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한다.“ 그는 평생 고통 받았다. 그리고 그 고통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것이 예술가의 운명이고, 그것이 차이콥스키가 남긴 유산이다.



“만약 내 생애에 있어 진정으로 감동이 깃든, 나라는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무언가를 악보에 옮겼다면, 그것은 교향곡 6번일 것이다.”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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