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시카즘: 침묵의 기도

러시아 정교회 영성

by 이헌철
image.png 러시아 정교회 교인의 기도하는 모습 www.juznevesti.com/

1804년 9월 12일 가을날, 러시아 사로프 수도원 인근 숲에서 한 수도사가 도끼로 나무를 패고 있었다. 50세의 세라핌 수도사는 이미 7년째 숲속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며 기도와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강도 세 명이 나타나 돈을 요구했다. 세라핌의 손에는 도끼가 쥐어져 있었지만, 그는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강도들은 그를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세라핌은 의식을 잃었다. 며칠 후 의식을 되찾은 세라핌의 입에서 나온 첫 말은 저주나 원망이 아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평생 수만 번 반복한 이 짧은 기도가 그의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강도들이 재판을 받을 때, 등이 굽어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야 했던 세라핌은 판사에게 그들의 용서를 간청했다. 기도가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그리스도의 자비가 그 자신의 본성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정교회가 천년 넘게 실천해온 헤시카즘(Hesychasm, Ἡσυχασμός)의 열매였다. 그리스어로 ’고요함‘을 뜻하는 헤시키아(ἡσυχία)에서 나온 이 영성 전통은, 끊임없는 예수 기도를 통해 내면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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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호흡이 되는 기도

어느 수도원의 젊은 수도사가 영적 아버지를 찾아왔다.

“장로님,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데(살전5:17), 어떻게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까? 저는 예배 의식에 참석하고, 정해진 기도문을 외우지만, 일하고 먹고 잠잘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노(老) 수도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들아, 기도가 네 호흡처럼 되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쉬지 말고 되풀이하라. 처음에는 입술로, 나중에는 마음으로, 결국에는 네 영혼 자체가 이 기도가 되리라.”

이것이 예수 기도(The Jesus Prayer)의 핵심이었다. 단 한 문장 속에 기독교 신앙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의 인성(人性)을, ‘그리스도’는 메시아이심을,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눅18:13)였고, 베드로가 물에 빠지며 외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14:30)의 메아리였다.

4세기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부터 시작된 이 기도는, 14세기 그리스 아토스 산의 수도사들을 거쳐 더욱 깊어졌다. 그들은 예수 기도를 호흡과 함께하며, 마음을 온전히 집중하여 드렸다. 바깥 세계의 소음을 차단하고, 감각을 넘어서, 내면의 고요 속으로 들어갔다. 고대의 한 영적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님의 기억이 네 각 호흡과 함께 있게 하라. 그러면 너는 침묵의 가치를 알게 되리라.”

러시아의 영적 스승들은 예수 기도의 발전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입술의 기도였다. 소리 내어 또는 속으로 기도문을 반복하는 단계였다. 두 번째는 집중된 기도였다. 기도의 각 단어에 정신을 모으며, 그 말씀을 마치 자신의 말처럼 말하는 단계였다. 세 번째는 마음의 기도였다. 기도가 더 이상 자신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되는 단계였다. 이 경지에 이르면, 기도는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가 되어 깨어 있든 잠들든 영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침묵에서 피어난 러시아의 영성

18세기 중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사제의 아들이었지만, 화려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갈망했다. 청년은 그리스 아토스 산으로 건너가 17년을 머물며 그리스어를 배우고, 4세기부터 15세기까지 교부들이 쓴 기도와 영성에 관한 고대 문헌들을 발견했다. 그는 이 보물 같은 글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파이시라는 수도명을 받은 그는 수십 명의 수도사와 함께 몰도바로 이주했다. 전쟁과 박해 속에서도 그는 번역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공동체는 수백 명으로 성장했고, 수많은 수도사들이 함께 교부들의 글을 옮겼다. 1793년, 『도브로톨류비에』('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가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러시아 땅에 영적 혁명을 일으켰다.

한 러시아 농부의 이야기는 더욱 감동적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고 방랑자가 되어, 성경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지 찾아 헤맸다. 어느 수도원에서 만난 장로가 그에게 예수 기도를 가르쳐주었다. 처음에는 하루 3천 번, 그 다음에는 6천 번, 나중에는 1만2천 번씩 기도했다. 수개월이 지나자, 기도는 저절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걸을 때도, 일할 때도, 잠잘 때도 기도는 그의 심장 박동처럼 계속되었다. 그는 낡은 보따리에 『도브로톨류비에』한 권만 넣고 러시아 전역을 순례하며 사람들에게 예수기도를 나누었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순례자의 길』은 헤시카즘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고전이 되었다. 이 익명의 순례자야말로 예수 기도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신학자도 사제도 아닌 평범한 농부가, 단 한 문장의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헤시카즘은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을 바꾸어놓았다. 수도원의 고귀한 전통이 평신도의 일상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농부도, 상인도, 귀족도 예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20세기 소비에트의 무신론적 박해 속에서도 이 기도는 끊어지지 않았다. 수용소의 죄수들, 지하교회의 신자들이 이 기도로 믿음을 지켰다. 어둠 속에서도 기도는 빛이 되었고 고난 속에서도 기도는 위로가 되었다.

image.png 기도하는 러시아 정교회 여성 @society.novyny.live/ru/religion

오늘날에도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은 이 단순하면서도 깊은 기도를 실천한다. 아침에 일어나 첫 호흡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며, 일터에서 잠시 쉬며,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를 되뇌인다. 기도가 습관이 되고, 습관이 본성이 되며, 본성이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이어진다.

다른 시각, 같은 갈망

물론 이러한 기도 방식에 대해 개신교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가장 흔한 비판은 마태복음 6장7절 말씀이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같은 문장을 수천 번 반복하는 것이 예수님이 경고하신 “헛된 반복”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호흡 조절과 반복을 통한 이 기도 방식이 동양 종교의 명상이나 염불과 너무 유사해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기도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대화가 아니라, 기계적인 반복이 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다.

이에 대해 정교회는 분명한 답변을 제시한다. 19세기 러시아의 영적 스승 테오판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 기도는 부적이 아니다. 그 능력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정신과 마음이 그분과 깊이 연합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여러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말을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핵심은 반복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였던 것이다. 성경도 반복 기도를 부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동일한 말씀으로” 세 번 기도하셨다(막14:39). 주님이 직접 가르치신 주기도문도 정형화된 기도문이다. 시편 136편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를 26번 반복한다. 요한계시록 4장8절의 네 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친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했는데,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짧고 단순한 기도를 반복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동양 명상과의 유사성도 겉모습일 뿐이다. 힌두교나 불교의 수행법은 자아를 소멸시키고 무(無)에 도달하려는 것이지만, 예수 기도는 인격적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려는 것이다. 동양 종교에서는 반복하는 말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지만, 예수 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겸손이 핵심이다. 목적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실제로 이 기도를 실천한 이들의 삶이 가장 강력한 증거다. 세라핌은 강도들에게 구타당한 후에도 그들을 용서했다. 익명의 순례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도 기쁨으로 충만했다. 20세기 수용소의 신자들은 이 기도로 절망을 이겨냈다. 기계적 반복이 이런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은 성령의 역사였고, 예수 기도는 그 은혜를 받는 통로였다.

세라핌은 말했다. “기도를 습득하라, 그러면 천국이 네 안에 있으리라.” 헤시카즘의 위대함은 복잡한 신학 체계가 아니라,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단순함에 있었다. 한 문장의 기도가 천 년을 이어오며 수백만 명의 영혼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피어난 러시아 정교회 영성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입술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영혼 전체가 그리스도의 빛으로 충만해지는 여정, 바로 그것이 헤시카즘이 제시하는 기도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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