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바보들:
유로지비가 건네는 질문

러시아 정교회 영성

by 이헌철
image.png 바실리 러시아 정교회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그 화려한 성 바실리 대성당의 이름은 한 거지에게서 왔다. 1468년 모스크바 근교 가난한 농노의 집에서 태어나, 1557년 죽을 때까지 누더기를 걸치고 쇠사슬을 두르고, 한겨울에도 맨발로 거리를 헤매던 광인이 있었다. 16세기 이반 뇌제 시대를 살았던 그는 사람들의 조롱거리였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고, 때로는 돌을 던졌다. 하지만 그가 죽자 이반 뇌제는 직접 그의 관을 메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축복받은 바실리, 그는 ‘유로지비(юродивый)’였다. ‘신의 바보’ 혹은 ‘그리스도를 위한 광대’라 불리는 이들은 러시아 정교회의 독특한 영성 전통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고, 관습을 무시하고, 권력 앞에서 두려움 없이 진실을 외쳤다. 외양은 가장 천한 자였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예언이 흘러나왔고, 그들의 손길에는 기적이 따랐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합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효율을 숭배하며, 성공을 측정 가능한 수치로 환산하는 이 시대에, 의도적으로 바보가 되기로 선택한 자들의 이야기는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소유를 거부한 자들의 자유

바실리의 행동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그는 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모스크바의 혹독한 겨울에도 벗은 몸에 쇠사슬만 두르고 맨발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시장 가판대를 엎어 빵을 쏟아버리고, 어느 날은 러시아 서민들의 발효 음료인 크바스 항아리를 일부러 깨뜨렸다. 분노한 상인들이 그를 때렸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빵은 덜 익었고, 그 음료는 상한 것이었다. 바실리는 맞아가며 사람들을 병으로부터 구한 것이다. 그는 귀족의 집을 지나가다 그곳 주인이 숨겨둔 보물을 훔쳤다. 사람들이 분노했다. 하지만 그는 그 금화를 가난한 과부의 문 앞에 슬쩍 두고 사라졌다. 그 과부는 자존심 때문에 구걸할 수 없었던 이였다. 바실리는 도둑이 되는 치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누군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거리의 술집을 지나갈 때, 그는 그 집의 모퉁이를 붙잡고 흐느껴 울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왜 우는 것이오?" 그가 대답했다. "천사들이 이 집 밖에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 때문에 슬퍼하고 있소. 나는 천사들에게 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청하였소." 그는 술집에 들어가 가장 타락한 자들 속에서도 선의 씨앗을 찾으려 했고, 친절로 그들을 격려했다. 이것이 유로지비의 역설이다. 그들은 세상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명예, 재산,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잃을 것이 없는 자는 두려울 것도 없다.

어느 날 이반 뇌제가 바실리를 궁전으로 불렀다. 황제는 세 번이나 포도주를 권했다. 하지만 바실리는 받을 때마다 창밖으로 포도주를 쏟아버렸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노브고로드에 불이 났소. 내가 불을 끄고 있소." 그가 말했다. 실제로 그 순간 노브고로드에서 화재가 났는데, 어떤 알 수 없는 사람이 물을 끼얹어 불을 껐다고 한다. 나중에 노브고로드 사람들이 모스크바에 와서 바실리를 보고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또 다른 날, 바실리는 미사 중에 이반 뇌제를 꾸짖었다. "당신은 교회에 있으면서도 정신은 보로비예프 언덕의 새 궁전을 짓고 있었소." 황제는 깜짝 놀라 인정했다. 정확히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바실리는 사순절에 이반에게 고기를 건네며 말했다. "고기를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오? 당신은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 무시무시한 황제도 바실리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실리에게는 잃을 것이 없었고, 두려워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룩한 바보’의 모습은 먼 러시아의 역사 속에만 박제되어 있지 않다. 우리 곁에도 그런 이가 있었다. 30년 넘게 맨발로 서울의 지하철을 누비며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을 쏟아내던 노인, 최춘선이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할아버지’라 부르며 비웃고 피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가 도쿄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자 김구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으며, 자신의 모든 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던져주고 스스로 낮아짐을 선택한 ‘현대판 유로지비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성 바실리가 쇠사슬을 두르고 권력의 허상을 꾸짖었듯, 최춘선은 맨발로 차가운 아스팔트를 딛으며 풍요에 취한 현대인의 영혼을 흔들었다.

현대인은 얼마나 많은 것에 묶여 있는가?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승진과 연봉에 자아를 저당 잡힌다. “이것을 잃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우리를 침묵하게 만든다. 부당함을 보고도 입을 다물고, 양심이 말하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유로지비는 묻는다.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아니면 소유물의 노예인가?


광기의 가면 뒤 진실

톨스토이는 유로지비에게 매혹되었다. 그의 단편 『바보 이반』은 유로지비 정신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반은 재산도, 권력도, 명예도 원하지 않는 바보 농부다. 형들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군사와 금화를 탐할 때, 이반은 묵묵히 땅을 일군다. 그가 왕이 된 나라의 법은 단 하나였다. “손에 굳은살이 박힌 자만 먹을 수 있다.” 악마는 이반의 백성들을 망치려 금화를 뿌렸지만, 그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세상은 이반을 바보라 불렀지만, 그의 나라만이 악마를 이겼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소냐는 더욱 강렬한 유로지비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판 창녀. 세상의 논리로는 가장 타락한 존재이다.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고백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일어나세요. 지금 즉시 네거리에 서서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세요. 그 다음 온 세상을 향해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말하세요.” 그녀는 경찰서로 가라고 하지 않았다. 먼저 땅에, 인류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고백하라고 했다. 촛불 하나 켜진 방에서 요한복음의 나사로 이야기를 읽는 창녀의 목소리가, 살인자를 새 사람으로 이끌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를 ‘유로지비’라 불렀다. 세상이 미쳤다고 말하는 자가, 실은 가장 제정신인 자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상’은 무엇인가? 끊임없는 경쟁, 비교, 성취, 번 아웃 되도록 일하고, 자신을 상품처럼 포장하고, 진정한 관계보다 네트워킹을 우선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정말 정상인가? 아니면 집단적 광기는 아닐까? 종종, 바보로 보이는 자가 유일하게 제정신인 자다.

image.png 바실리 러시아정교회 내부 출처:expedia.co.kr/St-Basils-Cathedral-Moscow-City-Centre.d501923.Place-To-Visit

거룩한 어리석음의 지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썼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고전4:10)고 썼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로마 제국의 시민들에게 어리석게 보였다. 성공,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가난하고 박해받는 자가 되기를 선택한 자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구세주로 믿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지만 역사는 누가 옳았는지를 보여주었다. 로마 제국은 무너졌고, 황제들의 이름은 잊혔지만, 그 어리석은 믿음은 세상을 바꾸었다.

유로지비의 전통은 이 ‘거룩한 어리석음’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것이다. 그들은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어리석어질 수 있는가? 세상의 조롱을 감수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는가? 현대 사회는 똑똑해지라고 강요한다.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손익을 계산하고, 리스크를 관리하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한 진실을 잃어버린다. 때로는 손해 보는 것이 옳다. 때로는 비효율적인 것이 아름답다.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이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다.

우리 시대의 유로지비를 향하여

유로지비를 다시 만들어내자는 말이 아니다. 쇠사슬을 두르고 거리를 배회하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 그 본질적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무엇이 당신의 입을 막고 있는가? 어떤 ‘정상’이 사실은 광기인지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바실리가 이반 뇌제를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특별한 자유 때문이었다. 현대의 권력은 황제가 아니라 자본일 수도, 여론일 수도, 혹은 우리 내면의 두려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대가를 치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이 정의한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다리가 잘못된 벽에 기대어 있는지 질문하는 것인가? 유로지비는 우리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세상의 기준으로 바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광기의 가면 뒤에 때로는 가장 맑은 정신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이 때로는 가장 거룩한 지혜라는 것이다.

붉은 광장의 성바실리 교회당은 여전히 아름답게 서 있다. 그 아름다운 교회당이 바로 유로지비 바실리를 기억하며 붙여진 이름이다.그리고 그 종소리는 여전히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거룩한 바보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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