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2. 대륙 탐방기

천 권의 책보다 값진, 대륙이라는 거대한 교과서

by 연휘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내 이삿짐의 절반은 책이었다. 이삿짐 제한 때문에 가전제품은 포기해도 아이가 읽을 책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천 권.


나는 그 책들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박스마다 번호를 매겨 중국행 배에 실었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정교한 시간표를 짜고 이 책들을 순서대로 읽히기만 하면, 낯선 타국에서도 아이의 성적이나 실력이 뒤처지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 천 권의 무게는 사실 엄마로서 내 유능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내 불안의 무게였다.



책꽂이에 꽂힌 천권의 책들과 북경집 거실 풍경


하지만 베이징에서의 생활은 시작부터 내 계획을 빗나갔다. 국내 거대 기업 연구소에서 수천 번의 실험을 설계하고 관리하던 내 경력은 중국의 온라인 쇼핑몰 ‘타오바오’ 앱 하나 앞에서 무너졌다. 한국에 가져갈 선물을 주문하려는데 옵션을 잘못 선택하고, 결제 승인이 안 되어 취소 버튼을 수십 번 눌러야 했다. 참다못한 중국인 판매자가 채팅창으로 내게 물었다.


"너 지금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니?(你在干嘛?)"

스마트폰을 붙들고 얼굴이 벌게진 채 아무 말도 못 하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한국에서 소위 ‘일 잘하는 기획자’로 불리던 내가 이곳에서는 온라인 쇼핑 하나 제대로 못하는 무력한 이방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내 설계도가 처참히 실패한 것을 인정한 그날, 나는 굳게 닫았던 방문을 열고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히는 대신, 진짜 중국을 직접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됐다. 1.5위안짜리 빠오즈(包子)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한 김, 길거리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아이와 낄낄거리며 나누던 이름 모를 간식들.


엑셀 시간표를 지운 자리에 우리는 대륙의 생생한 일상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바보 같은 시간들이 나를 숨 쉬게 했다. 단돈 1,800원짜리 간식도 빛의 속도로 배달해 주는 '메이투안(美团)' 기사님들의 역동적인 리듬을 보며, 나는 한국의 정교한 시스템보다 낯선 땅의 투박한 숨결에 내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본격적인 역사 여행을 시작했다. 상해에서는 화려한 와이탄 거리 대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좁고 낡은 골목을 찾아갔다. 에어컨도 없는 좁은 계단을 오르며 아이는 땀을 흘렸다. "엄마, 이봉창 아저씨는 여기서 김구 선생님이랑 마지막 인사를 하신 거야?"라고 묻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역사가 더 이상 종이 위의 글자가 아님을 느꼈다.


상해 (구)홍커우 공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


여정은 충칭과 하얼빈으로 이어졌다. 남들이 화려한 쇼핑몰과 마사지 샵을 찾을 때, 우리는 6년 동안 폭격을 견뎌낸 충칭의 방공호 흔적을 찾아가고 하얼빈 역의 차가운 플랫폼에 섰다. 아이는 안중근 의사가 서 있던 그 지점을 직접 발로 밟아보며 한참을 서성였다. 책 천 권이 가르쳐줄 수 없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아이는 낯선 땅의 흙먼지를 마주하며 스스로 찾아가고 있었다.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하얼빈 기차역과 자오린 공원의 청초당 비석


우리는 더 많은 도시를 가보고 싶었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바로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우리는 급히 귀국 가방을 싸야 했다. 대륙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침표를 찍었다.


가져간 책 천 권을 다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절반도 읽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그 종이 뭉치보다 훨씬 더 생생한 ‘대륙’이라는 현장을 온몸으로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짜놓은 시간표를 지우고 나니, 오히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배움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귀국으로 내 계획이 또 한 번 중단되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내 설계보다 삶이 가져다주는 우연한 배움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온 한국의 거실 식탁, 이제 나는 더 이상 아이의 가방에 천 권의 책을 억지로 밀어 넣지 않는다. 아이는 이미 현장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법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여행은 여전히 우리만의 속도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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