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는 도면

행위(Doing)에서 존재(Being)로

by 연휘

안내드립니다

​어제 착오로 인해 9화가 8화보다 먼저 발행되었습니다.

현재 순서를 바로잡아 8화가 수정되어 재발행 되었으니, 아직 8화를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전 글을 먼저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8화를 거쳐야만, 이 글에서 지성이 왜 도면을 비우기 시작했는지 그 진심이 온전히 닿을 수 있습니다. 혼선을 드려 죄송하고, 늘 낮은 시선으로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8화 바로가기]




서울을 떠나올 때, 지성은 모든 것을 내팽개쳤다.


하지만 단 하나, 그의 발목을 유령처럼 붙들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강남 한복판에 세워질 펜트하우스 ‘그랑 누아’.


지성이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화려한 수사학을 쏟아부었던, 그리고 결국 그를 공황의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던 설계안이었다.


지성은 며칠 전, 꺼져있던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켰다.


쏟아지는 부재중 전화 사이에서 클라이언트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었다.


[임 소장님, 잠적하신 건 알겠으나 최종 수정안은 주셔야죠. 이대로는 공사 진행이 안 됩니다.]


지성은 그것이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부채임을 알았다.


그는 폐교의 삐그덕거리는 책상 앞에 앉아 낡은 노트북을 폈다.


화면 속의 도면은 지성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빽빽한 선들, 과시적인 장식들, 평당 공사비를 극대화하기 위해 쑤셔 넣은 욕망의 잔해들.


마우스 클릭 한 번에 수천만 원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세계에서, 그는 늘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지금, 지성은 연필을 쥐고 그 화려한 욕망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장식들을 삭제할 때마다, 마치 무거운 갑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는 병사처럼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수정 도면을 보낸 직후, 기다렸다는 듯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임 소장님! 제정신입니까? 수정안이라더니 이게 뭡니까? 거실 한가운데를 왜 이렇게 텅 비워놨어요? 이 평수에 이 놀리는 땅이 다 얼마인데!"


예전의 지성이라면 세련된 건축 이론을 들이대며 상대를 제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지성은 낮고 고요했다.


"대표님, 그 공간이 없으면 바람이 머물 곳이 없습니다. 정오의 햇살이 내려앉아 쉴 자리도 없고요. 제가 지금까지 지어온 건 집이 아니라, 숨을 막히게 하는 화려한 감옥이었더군요. 이 '비어있음'이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책임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 이보쇼, 임 소장!"


지성은 조용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는 이제 건물을 '만드는(Doing)'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 생명이 '존재하게(Being)' 돕는 통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도면 한가운데의 빈 공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인간을 처음 설계한 보이지 않는 손 역시, 흙더미 속에 '숨'이 머물 수 있는 텅 빈 자리를 가장 먼저 마련해두었을 것이라고.


빽빽하게 채워진 인생은 자아의 불안일 뿐, 생명의 원형은 언제나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비어있음'을 통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그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설계도는 더 이상 그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 모를 누군가가 그곳에서 가장 편안하게 자신으로 머물 수 있도록 내어주는 '빈 의자'였다.


지성은 노트북을 덮었다.


이제 서울의 임지성은 완전히 죽었고, 서산 폐교의 임지성이 태어났다.


창밖을 보았다.


어제 이장이 받쳐두고 간 양은 냄비에는 맑은 빗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공포의 근원이었던 그 누수 지점은, 이제 지성에게 가장 정직한 '빛의 좌표'가 되어 있었다.


"이제 됐어."


비로소 모든 설계도가 폐기된 광야의 수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는 이 텅 빈 평안 안으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할 준비가 되었다.




[작가 코멘트]


우리는 늘 무언가를 ‘더 채워야’ 유능하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력서의 빈칸을 메우고, 통장의 숫자를 불리고, 집안의 가구들을 늘려가는 것이 곧 성공의 도면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설계된 도면일수록 바람은 길을 잃고, 빛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 필요한 건 더 세련된 인테리어가 아니라, 이름 모를 누군가가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빈 의자' 하나를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일지도 모릅니다.


텅 빈 도면을 들고서야 비로소 평안해진 지성처럼, 오늘 당신의 하루에도 아주 조금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빈칸'이 허락되기를 바랍니다.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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