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설계도가 증발하는 순간
지성은 도망치듯 교실을 뛰쳐나왔다.
입가에 묻은 흙먼지와 믹스커피의 잔향이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
그것은 지성이 평생 외면해왔던 자신의 ‘비참한 실체’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서산의 새벽은 짙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그의 시야에서 모든 선과 면이 지워졌다.
안개는 지성이 그토록 사랑하던 ‘직선’을 집어삼켰고, 세상은 형체 없는 회색빛 덩어리가 되어 그를 압박했다.
벅— 벅—
축축한 흙길을 내딛는 발소리가 안개 속에서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지성은 폐가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멈추면, 자신이 쌓아온 그 화려한 설계도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자신을 덮칠 것만 같았다.
그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이 건물을 세우지 않으면, 내가 이 가정을 지탱하지 않으면, 내가 이 완벽한 수직을 유지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파멸할 것이라는 거대한 착각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왔다.
그것은 지성이라는 건축물이 평생 견뎌온 ‘피로 하중(Fatigue load)’이었고, 이제 그의 영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휘어져 버리는 ‘좌굴(Buckling)’ 현상에 직면해 있었다.
‘내가 안 붙들면 다 끝장이야.’
지성은 이를 악물었다.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졌고,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중력은 평소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하게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찰나, 지성은 비틀거리며 길가에 주저앉았다.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멈췄으니, 내가 설계한 세상의 지반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아수라장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성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했지만, 해는 그 두터운 장막을 마치 찢어발기듯 폭발하며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빛은 단순히 밝은 것이 아니라, 지성의 오만한 허락 따윈 비웃듯 압도적이었다.
안개 속을 뚫고 나온 빛줄기가 이슬 맺힌 풀잎 위로 쏟아지는 세례를 보며, 지성은 자신의 비참한 존재감은 애초에 그 거대한 질서에 계산조차 되지 않았음을 직면했다.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 공중의 새들은 지성의 절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창조주가 마련한 아침 식탁 위에서 그저 평화롭게 노래할 뿐이었다.
지성은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 내가 붙들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것은 지독한 허탈함인 동시에 가슴이 우주적으로 뻥 뚫리는 듯한 해방감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처절하게 매달렸던 수평과 수직, 그 정교한 설계도들이 증발해버린 진공 상태.
내가 손을 놓아도 세상은 이미 완벽한 질서 속에 운행되고 있었다.
내가 유능하지 않아도 태양은 떠올랐고, 내가 통제하지 않아도 중력은 정교하게 작동했다.
지성은 처음으로 중력에 저항하는 대신, 그 위대한 힘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채 축축한 풀밭 위에 대자로 누웠다.
‘내가 신이 아니어도 괜찮은 거였어.’
그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내 힘을 뺄 때 비로소 주어지는 이 기묘한 피조물의 담대함.
그것은 자신의 유능함이 쌓은 성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선의(善意)’가 자신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의 안도감이었다.
안개는 걷히지 않았지만, 지성의 눈앞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해졌다.
그는 처음으로 설계도 없는 광야의 첫발을 오직 자신의 거친 호흡 하나만을 의지한 채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도망이 아니라, 이름 모를 은혜가 이끄는 안식처를 향하고 있었다.
[작가 코멘트]
우리는 종종 세상을 내 어깨로 떠받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짜 안식은 내 손을 놓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니 오히려 누군가의 거대한 선의가 나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시작됩니다.
완벽이라는 무거운 설계를 내려놓고 지성이 마주한 이 광야의 수업은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습니다. 90도 밖의 무질서 속에서 지성이 찾아낼 '진짜 조화'를 기대하며, 다음화에서 계속해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