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이 마른 자리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지성의 새벽을 깨웠다.
평소라면 80.5도씨의 정교한 온도로 내린 핸드드립 커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그를 '품격 있는 신사'로 유지해주었을 시간이었다.
지성은 커피에 관해서라면 웬만한 바리스타보다 까다로웠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의 꽃향기가 살아나려면 물의 경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원두 20g을 30초간 뜸 들이는 그 고요한 의식만이 그를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가동 버튼'이었다.
오후 4시에는 카카오 함량 72.2%의 스위스산 싱글 오리진 초콜릿 한 조각이 필수였다.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그 쌉싸름한 단맛은 지성이 세상을 향해 휘두르는 날 선 신경을 잠재우는 유일한 진정제였다.
하지만 지금 지성의 손에 잡히는 것은 바스락거리는 은박지 쓰레기뿐이었다.
서울에서 챙겨온 '고결한 안식'이 완전히 바닥난 것이다.
"하아... 고작 이거였나."
지성은 쓰레기통에 처박힌 초콜릿 봉지를 다시 꺼내 코를 박았다.
희미하게 남은 카카오 향이 그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긁었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자각이 그를 덮쳤다.
그가 평생 공들여 유지해온 그 고상한 취향과 매너는 인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급 당분과 카페인'이라는 정교한 마감재로 덮어둔 불안의 알리바이였다.
산지의 고도를 따지고 로스팅 포인트를 논하던 그 지적인 유희는, 사실 내면에서 요동치는 공포를 틀어막기 위한 가장 호화로운 땜질이었다.
이 마감재가 걷어지자,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비겁하고 예민한 '진짜 지성'이 괴물처럼 튀어나왔다.
지성은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노란색 비닐 봉지를 집어 들었다.
이장이 두고 간 믹스커피였다.
평소라면 '화학 첨가물의 쓰레기'라며 경멸했을 물건. 지성은 낡은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쇳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는 물소리가 마치 자신의 인격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같았다.
툭—
봉지를 뜯던 손등이 경련하듯 떨리더니, 하얀 설탕 가루가 지저분한 마룻바닥 위로 쏟아졌다.
"안 돼...!"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그 정교한 손가락이, 이제는 흙먼지와 뒤섞인 설탕 가루를 비굴하게 찍어 올리고 있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거친 흙의 식감과 저렴한 단맛. 지성은 그 순간,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듯 선명하게 깨달았다.
‘나... 정말 환자 맞았네.’
자신은 유능한 건축가가 아니었다.
고작 설탕 한 봉지에 자존심을 구걸하고, 커피 한 잔이 없으면 짐승처럼 돌변하는 중독자이자 중환자였다.
자신이 쌓아 올린 완벽한 인생의 성채는, 사실 이 얄팍한 단맛들이 지탱해주고 있던 사상누각이었다.
쾅—
문이 열리며 이장이 들어왔다.
지성은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뒤로 감췄다.
입가에는 미처 닦지 못한 설탕 가루와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아이고, 임 소장! 얼굴이 왜 그렇게 썩었어! 어디 속 쓰려? 거 믹스커피 그거 바닥에 쏟은 거 아녀? 대충 털어 먹어, 흙 좀 먹는다고 안 죽어!"
이장이 지성의 어깨를 툭툭 쳤다.
평소라면 '무례하다'고 느꼈을 그 손길이, 지금 지성에게는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난도질하는 칼날처럼 느껴졌다.
"나가세요!!!!"
지성이 비명을 질렀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대충? 흙 좀 먹어도 안 죽어? 당신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쌓아 올린 세상 때문에 내가... 내가 얼마나...!"
지성은 말을 잇지 못하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장은 당황한 듯 멈춰 섰다.
지성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자신의 '가짜 기초'를 들켜버린 아이의 처절한 자존심이었다.
"임 소장... 나는 그냥..."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당신의 그 역겨운 친절도, 이 쓰레기 같은 커피도 다 필요 없으니까!"
지성은 믹스커피 컵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챙그랑—
찌그러진 양은 냄비가 구르는 소리가 적막한 교실을 메웠다.
이장이 나간 뒤, 지성은 차가운 흙바닥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의 시작이었다.
달콤한 포장지를 걷어내고 마주한, 지독하게 가난하고 뒤틀린 자신의 민낯.
지성은 처음으로 신의 도움 없이는 설탕 가루 하나 앞에서도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의 파산을 인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