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설계하고 개척하는 삶인가? 설계된 경로대로 사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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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자기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잘 설계된 종착지를 향해 이동하고 있을 뿐인가?]
이 주제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비슷하게 불안한지를 묻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사는 방식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취업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회사를 버티고,
누군가는 이직을 고민하고,
누군가는 AI를 배우고,
누군가는 더 나은 기회를 찾습니다.
겉으로 보면 전부 다른 길입니다.
그런데 오래 들여다보면
그 다름 안에서 이상할 만큼 비슷한 것들이 보입니다.
비슷한 초조함,
비슷한 비교,
비슷한 피로,
비슷한 목표,
비슷한 종착지.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자기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미 사회와 조직이 좋은 끝이라고 부르는 방향을 향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이동하고 있을 뿐인가?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왜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그토록 비슷한 불안을 공유하게 되는지부터 다시 봐야 합니다.
심리학자 Richard S. Lazarus와 Susan Folkman의
스트레스 인지평가 이론(Appraisal Theory, Transactional Model of Stress and Coping)은
스트레스가 단순히 바깥 자극의 크기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상황을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로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불안은 세상이 힘들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이 내 삶과 미래,
가치에 어떤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가에서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왜 취준생과 직장인, 이직 준비자가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도
비슷한 긴장 속에 놓이는지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단지
일이 많아서만이 아닙니다.
혹은 경쟁이 있어서만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나를 어디로 밀어낼지,
내 자리가 흔들릴지,
내가 뒤처질지,
지금의 선택이 미래를 크게 바꿔버릴지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불안은
개인의 약함이라기보다
불확실한 시대를 해석하는 방식과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슷한 위협과 비슷한 평가 구조를 해석하며
비슷한 방향으로 마음을 긴장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왜 그 해석은
자꾸 비슷한 목표로 이어질까요?
왜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산다고 말하면서도
비슷한 안정, 비슷한 인정, 비슷한 성공의 형식을 붙들게 될까요?
심리학자 Stevan E. Hobfoll의
자원보존이론(Conservation of Resources Theory)은
사람이 자신에게 가치 있다고 여기는 자원을
얻고, 지키고, 잃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그 자원이 실제로 줄어들 때뿐 아니라,
줄어들 가능성이 커질 때도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이론은
전체를 꿰는 아주 중요한 장면을 설명해 줍니다.
사람들은 꼭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같은 목표를 좇는 것만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그 목표가 내 자원을 지켜줄 것 같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몰립니다.
안정적인 회사는
생계와 예측 가능성을 지켜줄 것 같고,
높은 시장가치는
기회와 이동 가능성을 지켜줄 것 같고,
좋은 평판과 경력은
나중의 손실을 줄여줄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성공을 좇는 동시에
손실을 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왜 각자의 길이 자꾸
비슷한 종착지로 수렴하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들이 꼭 같은 꿈을 꾸어서가 아니라,
불안정한 시대일수록
지켜야 할 자원이 비슷해지고,
그래서 모두가 더 안전해 보이는 방향으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선택지를 늘렸지만,
조직은 기준을 높였고,
시장은 비교를 촘촘하게 만들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자원을 잃지 않기 위해
비슷한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들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이라는
이 주제가 단순한 냉소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구조이고,
모든 불안이 자원 방어의 결과이고,
모든 종착지가 사회적으로 설계된 것이라면,
개인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한 가지를 더 봐야 합니다.
심리학자 Albert Bandura의
자기효능감 이론(Self-Efficacy Theory)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시작하고,
얼마나 노력하고,
어려움 앞에서 얼마나 오래 지속할지는
자신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정도와 깊게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론은
이 의 마지막 결론을
조금 더 정확하게 만들어줍니다.
구조는 분명 존재합니다.
비슷한 불안을 만들어내는 시대의 조건도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자꾸 같은 종착지로 몰리는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은 완전히 무력한 존재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위협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해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말 내가 선택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입니다.
자기효능감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구조를 모른 척 낙관하는 것도 아니고,
구조를 봤다고 바로 포기하는 것도 아닌
그 사이의 힘에 더 가깝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끌려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려 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내가 다시 나를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질문을 붙들 수 있을 때
사람은 비슷한 시대를 살면서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이라는 주제에서
마지막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더 빠른 전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한 질문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협으로 느끼며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해 이렇게 달리고 있는가?
내가 붙들고 있는 목표는
정말 내가 살아 있고 싶어서 붙든 것인가?
아니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직
내 삶을 다시 정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
이 질문은
사람을 잠깐 멈추게 만듭니다.
하지만 바로 그 '멈춤'이
'다들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이라
이 주제에서 끝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자주 비슷한 불안과 비슷한 손실의 공포 속에서
비슷한 종착지를 향해 걸어갑니다.
그러니 마지막에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더 빨리 갈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무엇에 쫓기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지키려 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 길은 정말 내 삶의 방향인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질문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사람만이
비슷하게 설계된 시대 속에서도
자기 삶을 완전히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Bandura, A. (1977). Self-efficacy: Toward a unifying theory of behavioral change. Psychological Review, 84(2), 191–215.
Hobfoll, S. E. (1989). Conservation of resources: A new attempt at conceptualizing stress. American Psychologist, 44(3), 513–524.
Lazarus, R. S., & Folkman, S. (1984). Stress, appraisal, and coping. Springer.
세상은 늘 다르게 보입니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멈춰 서 있고,
누군가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자리를 잡은 것 같고,
어떤 사람은 계속 흔들리는 것 같고,
어떤 사람은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는데도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듯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오래 보아왔습니다.
사람마다 조건이 다르고, 선택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삶은 원래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오래 들여다보면
그 다름 속에서 이상할 만큼
반복되는 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준비를 하고 있는데
비슷한 불안을 말합니다.
서로 다른 조직에 있는데도 비슷한 피로를 호소합니다.
서로 다른 선택을 했는데도 결국 비슷한 기준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기회는 많아졌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많은 사람은 전보다
더 쉽게 지치고,
더 자주 비교하며,
더 조용히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다들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은
바로 이 반복되는 장면을 따라간 글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비슷한 압박 속에서 살게 되는가?
왜 각자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비슷한 기준과 언어, 비슷한 성공의 이미지 앞에 서게 되는가?
왜 자유와 가능성이 넓어질수록
오히려 사람은 더 자주 자신을 점검하고,
더 자주 뒤처짐을 의식하게 되는가?
처음에는 이것이 개인의 태도와 성향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원래 불안이 많고,
누군가는 원래 경쟁심이 강하며,
누군가는 원래 남을 더 의식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글이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개인의 마음 이전에,
그 마음을 그렇게 만들도록 반복해서
압력을 가하는 사회와 조직의 구조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택은 언제나 이미 짜여 있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무엇이 더 나은 준비로 읽히는지,
어떤 이력이 더 가치 있어 보이는지,
어떤 태도가 더 성실하고 유능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어떤 삶이 더 성공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는지는
이미 사회와 조직, 시장과 기술이
일정한 방식으로 배열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점점 더 비슷한 표정으로 불안해집니다.
선택지는 많아졌는데 안도는 늘지 않았고,
기술은 발전했는데 사람은 더 여유로워지지 않았으며,
조직은 더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구성원이 체감하는 압박은 오히려
더 섬세하고 더 일상적인 방식으로 스며들었습니다.
AI는 더 많은 가능성을 약속했지만,
그 가능성은 동시에
더 많은 비교와
더 빠른 적응,
더 촘촘한 자기 점검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디지털 업무환경은 유연함을 말했지만,
많은 사람은 그 안에서 오히려
더 길게 연결되고,
더 자주 반응하며,
더 쉽게 소진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다른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들이 지나가는 문턱과 기준,
비교와 평가의 방식,
성공과 실패를 읽어내는 언어는
생각보다 훨씬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모두가 똑같이 산다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삶이
이토록 비슷한 종착지를 상상하게 되는지 묻는 일이었습니다.
왜 많은 사람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끝을 묻기 전에
먼저 사회가 더 낫다고 말하는 끝을 배우게 되는가?
왜 우리는
자기 삶의 기준을 세우기도 전에
이미 남의 속도와 남의 언어로 자신을 읽기 시작하는가?
왜 각자의 길을 걷는다고 믿으면서도
비슷한 불안과 비슷한 욕망, 비슷한 목표 속에서
서로를 닮아가게 되는가?
이 질문은
개인을 비난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이렇게 자주 흔들리는지를
개인의 부족함이 아니라 구조의 언어로 이해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구조를 본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교의 질서를 본다는 것은
더 냉소적으로 살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초조한지,
왜 어떤 기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왜 어떤 종착지를 내 욕망처럼 믿고 있었는지
조금 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남의 성공을 내 목표로 착각하는 일을 조금 줄일 수 있고,
이미 설계된 방향을 내 꿈처럼 반복하는 일을 조금 멈출 수 있으며,
비슷한 길들 속에서도 끝내 자기 삶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을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아닙니다.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도 않고,
같은 문턱 앞에 서는 것도 아니며,
같은 방식으로 읽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더 쉽게 통과하고,
누군가는 더 오래 설명해야 하며,
누군가는 같은 실력으로도 한 번 더 번역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더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 빨리 적응하라는 말도 아니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는 익숙한 문장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조금 더 조용하지만 훨씬 중요한 질문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성공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성공은
정말 내가 끝까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
『다들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은
정답을 주기 위해 쓰인 글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하나의 렌즈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당연해 보이던 불안을 다르게 읽는 렌즈,
개인의 문제처럼 보이던 경쟁을 구조로 읽는 렌즈,
내 욕망처럼 느껴지던 목표를 한 번 더 의심해보는 렌즈,
그리고 무엇보다
속도와 비교의 언어에 가려졌던 ‘방향’이라는 단어를
다시 붙들게 하는 렌즈 말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다른 길을 갈 것입니다.
누군가는 더 빨리 가고,
누군가는 더 늦게 가고,
누군가는 잠시 멈추고,
누군가는 돌아가며,
누군가는 남들이 보지 못한 길을 새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 다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름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묻게 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불안한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비슷한 종착지를 꿈꾸는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결국
남의 언어로 자기 삶을 설명하게 되는가?
그리고 언젠가 그 질문 끝에서
조금 더 깊고 조용한 질문에 닿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정말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아마 이 질문에는
한 번에 끝나는 답이 없을 것입니다.
삶은 계속 바뀌고,
기준은 계속 흔들리며,
사회가 좋다고 말하는 것도 계속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한 번 답하는 일이 아니라
계속 다시 붙드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할 수는 있어도
남의 삶을 대신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고,
비슷한 목표를 향해 움직일 수는 있어도
왜 그 길을 가는지 끝내 모른 채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도,
완전히 흔들리지 않는 삶이 아니라도,
남보다 훨씬 빠른 삶이 아니라도,
적어도 내가 왜 이 길을 가는지
조금은 설명할 수 있는 삶.
적어도 내가 붙든 목표가
정말 나와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끝내 말할 수 있는 삶.
적어도 비교와 불안, 구조와 기준 속에서도
자기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는 삶.
『다들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이 끝난 뒤에도
당신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비슷한 시대를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제는
조금 덜 조급하게,
조금 덜 남의 속도로,
조금 더 자기 질문으로
당신의 길을 바라보게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누가 더 빨리 갔는지보다
당신이 왜 그 길을 걸어왔는지를
더 단단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다들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끝내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도착했는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끝내 중요한 것은
그 길이 정말 당신의 길이었는가,
그리고 그 끝이 정말 당신이 원한 끝이었는가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 일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