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이 삼켜버린 ‘환자’라는 이름의 생애

3분의 벽, 증발하는 내 삶의 흔적

by 고기완

기기계기계부품이 된 육체와 번호표를 든 영혼부품이 된 육체와 번호

기계부품이 된 육체와 번호표를 든 영혼


아침 일찍 도착한 대형병원 대기실은 이미 거대한 대합실이다. 번호표를 뽑는 순간, 나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에서 ‘대기 번호’라는 숫자로 바꿔 담게 된다. 전광판에 내 번호가 뜨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핸드폰에 고개를 묻거나 지친 눈을 감는다. 그 정적 속에서 문득 서글픈 마음의 생각들이 스친다.


‘이곳에서 나는 치유를 기다리는 환자일까, 아니면 효율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대상일까?’


대형병원의 진료는 놀랍도록 효율적이다. 아니, 효율적이어야만 유지되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와 같으며 밀려드는 환자들 사이에서 의사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결함’을 찾아내야 한다. 질문은 기계적이고 로봇화되고 설명은 생략된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언제부터죠?”, “약 처방해 드릴게요.”


단 3분. 내 몸이 보내온 간절한 신호와 그 속에 담긴 삶의 맥락, 질병 뒤에 숨은 불안과 두려움이 전달되기엔 정말 턱없이 부족한 시간들이다. 진료실 문을 나설 때 느껴지는 허전함은 병이 낫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소외감에서 기인한다.


현대 최첨단 의학의 데이터 세트 속에서, 환자가 살아온 세월과 마음의 고통은 ‘비효율적인 정보’라는 미명 아래 편집되고 무시당하곤 한다.




수치는 정상인데, 왜 나는 여전히 아픈가

최첨단 의학 기술은 정밀해졌고 영상은 선명해졌다. 이제 병은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통증의 뿌리, 왜 하필 지금 이 시기에 아픈지, 이 병이 내 삶의 지나온 흔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검사 결과지는 ‘정상’을 가리키지만, 환자의 삶은 여전히 ‘비정상’의 고통 속에 머문다.


의학이 ‘질병(Disease)’이라는 물리적 현상을 고치는 데 몰두하는 동안, 환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인 ‘질환(Illness)’은 방치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고쳐진 것은 수치요, 남겨진 것은 마음이다.


병원은 병을 고치는 곳이지만, 환자는 단순히 병만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불안, 후회, 스트레스, 뒤엉킨 관계를 모두 짊어진 채 진료실 의자에 앉는다. 그러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그 모든 ‘삶의 군더더기’는 가차 없이 잘려나간다.




마주 보는 두 개의 부품

이 비극을 단순히 ‘의사가 불친절하다’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의사 역시 이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서글픈 존재들이다.


환자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도 문밖을 메운 대기 순서라는 압박이 그들의 귀를 막는다. 과학적 합리주의기계론적 생명관에 매몰된 현대 최첨단 자본주의적 의료 시스템 안에서, 의사와 환자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스쳐 지나간다.


전체론적 관점이 결핍된 시스템은 결국 의사와 환자 사이의 깊은 불신만을 잉태할 뿐이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면서도,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각자의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소외된 부품이 되어간다.




치료(Cure)를 넘어 치유(Healing)로

가장 아플 때 찾는 곳이 병원이건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병원에서 가장 깊은 고립감을 느낀다. “괜찮습니다”, “큰 문제 아니네요”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 문장 속에 정작 ‘나’라는 주체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치유는 망가진 기계를 수리하는 과정이 아니다. 환자가 자신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그 고통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 비로소

‘치유(Healing)’의 서막이 열린다.





치료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다.



약과 수술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는 순간이다. 내가 왜 아픈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이 나를 이토록 지치게 했는지... 그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영혼은 이미 절반 이상 치유되기 시작한다.


환자는 부품을 교체하러 온 로봇이 아니다. 몸이라는 도화지에 자신만의 생애를 써 내려온 삶의 주인공이다.


차가운 대기실에 앉아 있는 저 환자들의 통증과 불안은 데이터 수치만으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소중한 삶의 일부다. 우리 의료인들이 끝내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은 명확하다.




환자는 고장 난 기계가 아니라,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존엄한 내일을 이어가고 싶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