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묻지 않기로 했다.

by 허버지

나는 아이에게 꿈을 묻지 않기로 했다

얼마 전 아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가족관계와 연락처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적는 칸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아이의 희망 직업을 쓰는 란이 있었다. 아주 익숙한 질문이었다. 어른들은 오래전부터 아이들에게 비슷한 말을 해왔다.

“너는 꿈이 뭐니?”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공부 잘해서 어떤 사람이 될 거야?”

듣고 있으면 다정한 관심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말은 아직 세상을 충분히 살아보지 않은 아이에게 제법 그럴듯한 꿈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다. 마치 어릴 때부터 분명한 목표를 품고 한길만 걸어야 제대로 된 삶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종종 그런 서사를 만난다.
어릴 때부터 단 하나의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흔들림 없이 노력했고, 결국 원하는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 물론 그런 삶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것들 속에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고, 그때그때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만들어간다. 누군가는 부모의 기대 속에서 꿈을 정하고, 누군가는 우연히 만난 사람을 보며 방향을 바꾸고, 누군가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뒤늦게 자기 길을 찾는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어릴 때의 나는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부자가 되고 싶었다. 그게 꿈이라면 꿈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또 달라졌다. 군대에 있을 때는 장교나 부사관 같은 길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내가 보고 있던 세계 안에서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선택지가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떤 거대한 소명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현실과 내가 겪은 시간 안에서 그때그때 다른 미래를 상상해온 사람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꿈은 어느 날 완성된 문장처럼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경험 위에 조금씩 쌓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그럴듯한 직업 이름을 빨리 말하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자기 마음을 천천히 알아가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사, 변호사, 연예인, 운동선수.
아이들은 때때로 반짝이는 이름을 먼저 배운다. 하지만 직업의 이름을 아는 것과 자기 삶의 방향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어른들이 바라는 것은 대개 멋진 대답이지만,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멋진 직업명이 아니라 자기 안에 무엇이 남는지를 살펴볼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에게 꿈을 말하라고 재촉하는 대신,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무엇을 할 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무엇을 배우면 조금 더 신나 하는지, 무엇을 한 번 더 해보고 싶은지를 묻고 싶다. 꿈은 어쩌면 그런 작은 관심들 속에서 시작되는 것일 테니까.

살면서 나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늘 같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잘한다고 해서 꼭 오래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은 평생 취미로 남을 때 가장 빛나고, 어떤 것은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될 때 제 자리를 찾는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이 둘을 쉽게 섞어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만 제대로 사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잘하는 일만 붙들고 살아야 현실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좋아하는 것이 삶을 버티게 해주기도 하고, 잘하는 것이 자존감을 지켜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부러워할 이름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때 조금 덜 무너지고 조금 더 살아 있는 기분이 드는지를 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더 믿게 되었다.
성공은 꿈을 가졌다고 해서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성공을 만들어내는 것은 올바른 가치관이고, 반복되는 하루를 견디는 생활방식이고, 갈등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풀어가는 태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삶의 방식은 그대로 둔 채 꿈만 자꾸 바꾸려 한다. 살아가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결과만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더 지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아직 꿈을 찾지 못한 아이에게 나는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직 모르겠다면 괜찮다고. 너무 이른 나이에 정답처럼 미래를 말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대신 네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네가 반복해도 덜 지치는 것이 무엇인지, 네가 사람들과 부딪힐 때 어떻게 풀어가는지,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천천히 알아가자고 말해주고 싶다. 결국 오래 가는 사람은 거창한 꿈을 먼저 말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다루는 법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조건부터 배우는 세상이 조금 안타깝다.
학력, 전공, 돈, 지역, 스펙. 사람들은 꿈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먼저 조건을 따진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도 전에, 남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부터 배우게 된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너무 일찍 현실만 가르치면 아이는 자기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접어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들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자주 묻지 않는다.
그 질문은 때로 아이에게 생각보다 큰 부담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요즘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경험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지 묻는다. 그리고 부모로서 조심스럽게 말해준다. 이건 한 번 경험해봐도 좋겠다, 저건 네가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 너무 겁내지 말고 천천히 해보자고.

나는 아이들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는다.
그 말이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내가 더 바라는 것은 따로 있다. 아이들이 자기 삶 안에서 자주 행복했으면 좋겠다. 남들보다 앞서가는 사람보다, 자기 마음을 오래 잃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잘나가는 사람보다, 자기 삶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성공은 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복은 의외로 작은 경험에서 시작된다.
무언가를 해봤는데 생각보다 즐거웠던 일, 해내고 나서 스스로 조금 대견했던 순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움직였던 하루.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 사람은 자기 삶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갖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성공도, 그런 감각과 태도를 잃지 않고 오래 걸어간 사람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받아온 종이 한 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희망 직업을 적는 칸보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는 여백이 아이들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어쩌면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꿈을 빨리 정하는 일이 아니라, 꿈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 묻는다.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묻는 대신,
요즘 무엇이 재미있느냐고.
무엇을 해보고 싶으냐고.
그리고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천천히 같이 찾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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