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누가 할래? (기획노동)
처음 자취를 시작하던 날을 기억하는가. 짐을 풀고, 텅 빈 냉장고 앞에 서서, 이제 진짜 어른이 됐다는 묘한 설렘과 함께. 대부분은 며칠도 지나지 않아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화장지가 다 떨어졌다. 아, 사야지 생각했는데 잊어버렸다. 전기요금 납부 문자가 왔는데 기간이 지나버렸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재료가 없어서 또 배달 앱을 켠다. 세탁기는 이틀째 빨래가 가득 들어있다. 분리수거 날이 언제인지 몰라서 봉투가 쌓인다.
아무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1인 가구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막상 혼자 살아보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압박보다 '뭘 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판단하는 것'이 더 지치게 만든다는 걸 깨닫는다.
집을 굴러가게 하는 데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자원노동이다.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행동이다. 직장에 나가고,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것. 삶의 물질적 토대를 만드는 노동이다.
둘째, 가사노동이다. 실제로 몸을 움직여 집을 유지하는 것. 청소하고, 요리하고,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는 행위. 결과가 눈에 보인다. 닦으면 깨끗해지고, 요리하면 밥상이 차려진다. 다만 완료는 없다. 내일이 되면 다시 더러워지고, 다음 끼니는 또 찾아온다. 가사노동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이다.
셋째, 기획노동이다. 이 집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언제 해야 하는지 판단하고,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처리할지 결정하고,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모니터링하는 것. 몸은 가만히 있어도 뇌는 항상 켜져 있다.
1인 가구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나'의 몫이다. 그래서 처음 자취를 시작한 사람 대부분이 한 번씩 작은 실패를 경험한다. 장을 안 봐서 굶거나, 공과금을 연체하거나, 냉장고 안에서 무언가가 썩어있거나. 이건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다. 세 가지 노동을 동시에 혼자 감당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는 가구원 수와 전혀 무관하게 작동한다는 점이다. 혼자 살아도, 둘이 살아도, 아이가 셋인 집도, 어르신 부모님을 모시는 집도. 심지어 나와 고양이 둘이 사는 집도 마찬가지다. 고양이 밥은 누가 살 것이며, 화장실 모래는 언제 교체할지, 예방접종 일정은 누가 챙길 것인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집에도 기획노동은 어김없이 존재한다.
그런데 잠깐, 기획노동의 범위를 너무 좁게 보지는 않았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냥 살고 싶은 게 아니다. 잘 살고 싶다. 먹고사는 것만 해결되면 됐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건 더 나은 삶, 더 나은 선택, 더 나은 미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계획이 필요하다.
내 월급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생활비는 얼마로 잡을 것인가. 내 집 마련은 언제쯤 가능한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몇 년을 더 버틸 것인가, 아니면 이직을 준비할 것인가. 경력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이것들은 모두 기획의 문제다.
여름휴가 하나를 잡아도 그렇다. 선택지는 무한하다. 국내냐 해외냐. 바다냐 산이냐. 에어비앤비냐 호텔이냐. 예산은 얼마나 쓸 것인가. 최대한 아끼며 갈 수도 있고, 이번 한 번은 황제처럼 쓸 수도 있다. 어느 쪽도 정답이 없다. 다만 내가 지금 가진 데이터, 통장 잔액, 연차 일수, 함께 가는 사람의 선호, 올해 남은 큰 지출 계획을 모두 머릿속에 올려놓고, 그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를 고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게 기획이다.
누군가의 삶이 유독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흔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론 운은 실재한다. 하지만 좋은 성과의 뒤에는 대개 치밀한 계획이 먼저 있다. 운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상태를 미리 만들어두는 것, 그것도 기획의 일부다.
그렇다면 이 기획, 누가 하고 있는가.
나 혼자 살 때는 답이 명확하다. 내가 해야 한다. 아무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자취를 시작한 사람들은 무섭도록 빠르게 배운다. 기획이 없으면 삶이 삐걱거린다는 것을.
문제는 함께 살기 시작할 때다. 둘이 되고, 셋이 되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만들어질 때. 기획노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기획을 '누가'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