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복선
비극의 복선
오전 9시, 노트북 한 대를 켜고 문장을 쌓아 올릴 때 저는 굳이 주인공의 몰락을 설계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 처한 현실을 투박하게 밀어붙이다 보면, 비극은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집필 중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완벽주의 화가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가 붓을 떨어뜨리거나 미세하게 손을 떠는 장면은 제가 공들여 배치한 함정이 아닙니다. 그저 그의 지독한 완벽주의가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징후일 뿐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사소한 떨림에서 이미 복선을 읽어내게 됩니다.
설계자인 저 역시 그 징후들이 결말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얼마나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처럼 인과관계가 확실한 세계의 질서를 신뢰하며 이야기를 전진시킵니다.
하락의 복선
하지만 오후가 되어 노트북 화면에 주식 차트를 띄우면, 오전의 그 예리했던 설계자의 감각은 순식간에 마비됩니다. 시장은 소설 속 복선보다 훨씬 더 투박하고 선명한 하락 신호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쓰라린 기억은 카카오였습니다. 시장은 제게 수많은 복선을 보냈습니다. 지지선이 무너지는 장대음봉, 거래량이 실린 하락세, 그리고 이동평균선의 역배열까지. 제 계좌를 갉아먹는 차트의 비명은 애써 노이즈나 일시적 조정으로 치부했습니다.
데이터는 정직하게 몰락을 예고하고 있었으나, 관찰자인 저는 제가 보고 싶은 시나리오에 갇혀 그 모든 선명한 복선을 무시했습니다.
설계자의 확신과 관찰자의 맹점
왜 저는 자산의 비극 앞에서는 이토록 눈이 멀었을까요?
소설 속에서 저는 인물의 운명을 결정짓는 설계자이기에, 작은 복선조차 결말과 연결되는 논리적 고리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저는 거대한 흐름에 올라탄 나약한 참여자일 뿐입니다. 시장의 신호는 제가 직접 심은 것이 아니기에 자꾸만 희망이라는 필터를 끼우고 바라보게 됩니다.
소설에서는 개연성이 없으면 서사가 무너지지만, 시장에서는 아무런 개연성 없이도 장대음봉 하나로 비극이 완결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데이터가 보내는 하락 신호는 비정한 경고였습니다.
후천적 생존자의 정직한 복기
이제 저는 오전의 설계자로서 문장을 뚝딱거릴 때마다, 오후에 마주할 차트의 냉혹함을 떠올립니다. 소설 속 화가의 붓 끝이 흔들리는 것이 비극의 서막이듯, 제 계좌의 이동평균선이 무너지는 것 또한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닌 냉정하게 손절매를 결행해야 할 시점임을 뼈저리게 되새깁니다.
복선을 잘 깔고 분석하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나타난 신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매일 노트북 앞에서 고뇌하며 살아남고 있습니다. 비논리적인 하락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투박한 경험들은 책상 앞에서의 설계보다 훨씬 더 선명한 통증을 남기지만, 그 통증이야말로 저를 더 단단한 후천적 생존자로 만들어줍니다.
저녁 테니스 코트에서 라켓을 상전으로 모시지 않고 힘을 빼는 법을 배우듯, 시장의 복선을 희망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