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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짤리짤리 Oct 14. 2022

나는 몇 등급 일까? : 입시 전쟁

격차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서열

좋은 간판 세우기

 온라인에서 떠도는 계급도를 처음 접한 건 대학교 서열에 관한 것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순위 매김이 해마다 버전이 업데이트되며 온라인상을 떠돌아다니고, 커뮤니티 이곳저곳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한다.

 대게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들 위주로 등급이 매겨지고 몇몇 유명한 지방 소재 대학이 중간중간 끼워진 형태다. 그리고 그 이외의 대학은 순위 없이 소위 '이하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의 약어)로 불린다. 한 때 난립했던 대학들이 일부 폐교되고 있음에도 2020년 기준으로 전국의 대학 수가 총 339개 인 것을 감안하면, 떠도는 서열표의 하단부에 있더라도 전체 대학 중 상위 10% 이내의 학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상층부를 차지한 그룹 안에서도 또다시 그들만의 계급이 나누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카페 `수만휘(수능날만점시험지를휘날리자)` 게시물 캡처



 꽤 오래전 일이지만 나의 입시를 되살려보면, 많은 학생들이 원하는 학과보다는 학교의 이름이나 소재지를 더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삼았었던 것 같다. 진로에 대한 지도를 해야 하는 담임선생님들도 학생 개개인의 성향과 꿈을 살피기보다, 그저 더 좋은 간판을 가진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이 목적처럼 보였다. 서울대 몇 명, 연고대 몇 명과 같은 타이틀이 담임 선생님의 실력이자 그 학교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지표로 여겨졌던 탓일 테다. 공교육의 목적은 결코 명문대 진학률에 있지 않음에도 고3 교실의 현장은 학교 밖 민간 학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작동하는 듯했다.  

 기대와 달리 출신 대학이 학생 개개인의 업무 성과를 보장하거나 생애 소득을 결정해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마치 입시가 목표가 되어버린 상황은 우리의 공교육 제도가 학업성적 외에 학생들의 관심이나 재능을 끌어내는 것에 실패했음을 말해 준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몰개성의 연속이었다. 등교를 하면 안전을 이유로, 사실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교문을 잠가버리고 똑 같이 생긴 교실에서 모두 같은 one-way 방식의 수업을 받는다. 두발 규정 등에 맞춰 비슷한 모습을 하고 같은 교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이제 두발 규정은 없어졌다지만 대신 학교에서 무엇을 먹을지 정해 준다고 한다. 선택권이 없는 학교급식은 군인처럼 식사를 배급받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차별을 배제하고 획일화시키려는 시도가 옳은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분명한 건 인간의 본성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교육의 평준화가 사교육의 활성화를 자극하고 특정 학군 더욱 수요를 부추기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처럼 대게 명분에만 집착하고 본성에 반하는 정책들은 부작용 커서 성공하기 어렵다. 평등이라는 가치도 좋지만 과도한 획일화가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과연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학 서열에 집착하는 것도 어찌 보면 평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시험을 치르며 답이 정해진 문제를 얼마나 많이 맞히느냐에 따라 줄을 세우다 보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남들보다 높은 점수를 올리는 것이 우선 시 되어 버린다.  목표의 우선순위는 학교의 레벨이 되고 학과는 적당선에서 타협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어른들로부터 하고 싶은 일은 대학에 가고 나서 찾아도 된다고 종용받기도 한다. 사실 그런 충고를 하는 어른들 역시, 대부분은 자기 인생의 정답도 찾지 못한 채 정신없이 휩쓸려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임에도 말이다. 어릴 적부터 정해진 교육을 수동적을 따르도록 강요받다 보니 생기는 중요한 문제는 전공과 진로의 연관성이 낮아지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모른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위치가 정해질 뿐,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고 탐구하는 훈련을 해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전공과 진로의 연관성이 낮다는 것은 그 만틈 사회적 비용이 낭비된다는 뜻이기도 한다. 



 소 팔아서 대학 보낸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생의 위상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1970년대였다. 산업 구조 고도화 과정에서 행정관리직, 전문기술직 등의 고학력자 수요가 폭증했던 반면 대졸자의 공급은 부족했다. 이른바 대졸자 임금 프리미엄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하며 비대졸자와의 격차를 벌려 놓았고 모두가 가난했던 경제성장 초기 시절 이러한 임금격차는 향후 자산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학력은 확실한 출세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대입 정원이 대폭 늘어나기 시작하고, 민주화 바람과 노동조합 설립 등의 영향으로 대졸자의 임금 프리미엄은 점진적으로 낮아지기 시작한다. 80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대한민국 소득불평등이 가장 완화되었던 시기였는데 실제로 1980년 대졸자는 비대졸자에 비해 평균 300%를 상회하는 임금을 받았지만 이러한 격차는 지속적으로 줄어들며 90년대 중반에는 160%의 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고성장의 호황 속에 낙수효과가 현실화되며  상향평준화가 이뤄지던 시기이다.


 하지만 임금격차는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중요한 요소는 대학의 졸업 유무가 아닌 대기업 집단 소속 여부가 되었다. 대학 진학률은 꾸준히 높아지며 그 희소성을 잃어간 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차이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과거 대졸자의 임금 프리미엄이 대기업 근로자의 임금 프리미엄으로 옮겨 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대기업 근로자의 평균 임금 수준은 중소기업 근로자의 125% 수준을 기록했지만 이 격차는 점점 커지며 2015년에는 170%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는 대기업의 본사와 요직이 몰려있는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해야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대학 졸업 여부가 아니라 어떤 대학을 졸업했느냐가 소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상급 대학 진학을 위한 사교육 열풍이 시작된 배경이다. 



 이제는 달라질까?

 세상은 변화한다. 이제 학벌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미 죽어버린 지식을 강제로 주입시키던 방식의 공부는 이제 끝났고, 개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 들을 이끌어내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견 옳은 예기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입시전쟁은 치열하다. 사실 수험생의 절대적 수치만 놓고 본다면 입시 경쟁률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대학 정원은 그대로이지만 출생률 저하로 응시생의 수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의 강도는 되려 세졌다. 아이들을 경쟁적으로 선행학습으로 몰아넣으며 조기교육을 시킨 탓이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 수는 줄어도 상급 서열의 학교들부터 정원이 채워지기 마련이니 일부 학교가 폐교되는 와중에도 상단부의 경쟁은 변함이 없다. 수십 년간의 대학 서열도 큰 틀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만약 기업이라면 순위가 들쑥날쑥하며 새로 리스트에 진입하거나 사라지는 경우도 많겠지만 대학의 서열은 크게 변동하지 않고 고착화된 경향이 있다. 

 초중고등학교의 모습도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를 체질을 바꿔온 분야는 오히려 민간 사교육 영역이었다. 상황이 그러하니 정체되어 있는 공교육이 사교육과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학생들은 사교육에 더 몰리게 된다. 유명한 1타 강사 한 명이 수천 명의 일선 교사들의 수업을 대체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이러한 사교육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상위 대학 진학 일 뿐이다.

 좋은 대학 간판을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첫 번째 이유는 여전히 취업이다. 학벌이 좋은 사람일수록 더 나은 조건으로 커리어를 시작하고,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부모세대와 달리 지금의 졸업생들은 괜찮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보장받지 못하는 불확실성에 처해있다. 갈수록 좋은 직장의 문이 좁아지니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소위 인 서울 대학 입학에 성공해도 남보다 나아 보이는 스펙을 쌓기 위해 열심히 또 열심히 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교육에 대한 가치관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서열 경쟁만 계속되고 있다. 주위에서 다들 뛰어가니 함께 뛰는 것 외에 딱히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테다. 기성세대인 부모는 관점을 바꾸기 어렵다.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있는 건 학생들 스스로이다.



개천에서 용이 날까?

  우리나라에 초등교육이 의무화된 것이 1950년대 후반이고, 중등교육의 의무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총 9년의 의무교육을 거쳐야 하고 고등학교는 대부분이 졸업하지만 법적 의무는 아니다. 의무교육의 주목적 중 하나는 가정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생업을 위해 공부를 포기해야 했던 아이들이 많았고, 그러한 교육 격차가 성인이 되어서의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의 격차로 이어졌다. 이에 정부는 기회의 평등과 양질의 노동력 양성 차원에서 무상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게 된다.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이자 기회였다. 전반적인 소득 수준의 향상과 높은 교육열로 가시적인 성과로도 이어졌다.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났어도 열심히 공부하여 출세길이 열리기도 했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현실화되기도 했다. 어쩌면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절대적 가난에 처해 있었기에 가능했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비슷한 시작점을 가졌던 것이다.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던 시기였다.

 이후 고등교육이 보편화되며 차별성이 없어지니 대학에 진학하여 고학력자가 되고자 했고, 대졸자가 넘쳐나니 대학원을 졸업하거나 해외유학을 하려는 수요가 늘어났다. 물론 직장인 평균 연봉을 넘어서는 학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수십 년간 변함이 없는 공교육은 외면받고 있고, 부모들은 양질의 교육을 위해 추가적인 시간과 돈을 기꺼이 지불한다. 모든 부모가 이러한 행렬을 따라갈 형편은 되지 못하니 아이들은 서로 다른 시작점을 갖게 되었다. 학생 개개인의 자질과 무관하게  부모의 소득이 자녀의 학업 성과와 강한 연계를 갖게 되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영어유치원을 가거나 조기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일터에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던 아이들은 이제 다르게 공부하고 다르게 논다. 개천에서 용이 날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18년 겨울 방영되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종합편성 채널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인 23.8%라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전국적인 붐을 일으켰다. 크고 작은 에피소드의 중심 주제는 역시 '교육열'이었다. 고소득층의 부모들이 소위 '입시 코디네이터'라고 불리는 이들까지 고용해 가며 자녀의 명문대 진학에 힘 쏟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서는 것 만이 삶의 목표라 가리키는 아버지와 자녀의 성공적 입시가 좋은 부모의 지표라고 여기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은 잃은 채 오직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고 느끼는 아이들.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우리 교육의 현실과 그 안의 구성원들은 과연 행복한 것 인지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이는 시대의 보편적 감정을 담아낸 듯하면서도 디테일은 우리 사회 주류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사람들. 즉, 주류로 부터 벗어나 어린 시절부터 커다란 격차를 온몸으로 느끼며 자라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어떨까. 주류가 그들에게 무관심하는 동안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품어 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성인이 되어 실패를 겪고 어려움에 처할 때 자신의 부족함만이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양쪽 어느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결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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