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 이야기
예전에 어떤 부모님에게 이런 직설적인 평가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말씀 뭐하지만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는 겉모습도 그렇고 차갑고 딱딱해서 뭐 이런 사람이 상담을 한다고 하냐고 생각했었어요. 말도 되게 이성적으로 하시고, 공감도 별로 안 해주시는 것 같고요."
"근데 선생님이 우리 아이 만나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편하게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되게 놀랐어요. 두 사람이 있는 모습이 되게 자연스럽고 뭐라 해야 하나. 마치 우리 아이가 아무 문제가 없는 아이인 것처럼 보여지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솔직히 전 조금 감동까지 받았어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훅 하고 들어오는 그 말을 듣고 그날 내내 나는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떠 올랐다. 칭찬이기는 하지만 마냥 기분 좋다 할 수는 없는 그 부모님의 평가는 내가 상담자로서 아프게 생각하는 부분,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모두 건드리고 있었다.
전에 썼던 글처럼 나는 통상의 상담자보다 공감이 서툰 편이고, 늘 그것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아이의 부모님을 면담하는 자리에서는 아무래도 사실 전달이나 현실적인 조언 등을 많이 하게 되다 보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고달픈 속내를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낄 소지가 많다. 그래서 이 부모님이 지적했던 첫 번째의 느낌은 내 입장에서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가혹하고, 틀리다 할 수 없는 평가이기도 했다. 다소의 억울함은 있었지만.
그런데 중요한 건 부모님의 두 번째의 말이다. 내가 아이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의 그 어떤 부분에서 그 부모님은 좋게 느끼고, 심지어 감동을 받았을까? 아니 똑같은 상담자이고, 내가 부모님을 대할 때나 아이를 대할 때나 굳이 어떤 다른 mode를 변경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나올까? 내가 뭘 어쨌다고.
두 번째 피드백에 담긴 부모님의 말을 잘 곱씹어보면 부모님은 내가 뭘 잘한 것에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감동을 받은 포인트는 십 수년 그렇게 부모 속을 썩이고, 앞으로도 속을 썩일 일만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던 당신의 아이가 마치 그냥 옆집 아이처럼, 동네의 여느 아이처럼 누군가를 만나 편하게 대화를 하고, 같이 웃고, 친구 같은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는 그 풍경에 있었다. 아픈 아이를 둔 부모가 가장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장면이란 당연하게도 그런 일상적인 풍경일 것이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 아이를 그냥 보통 아이처럼 대한 일 뿐이었다. 다르게 말해보면 그 아이의 아프고 모자란 부분에 시선을 두기보다 그 아이의 일상적이고 건강한 모습에 관심을 보냈던 것이다. 아이의 아픈 면 때문에 오래 마음고생했던 부모는 오히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런 부분 말이다.
사실 아이와 부모님은 전에도 오랜 기간 상담센터를 다닌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곳에서는 나보다는 훨씬 더 공감을 잘해주고, 잘 받아주는 상담사들을 많이 만나봤던 터라 그 부모님 입장에서는 그들과 영 느낌이 다른 나를 만나서는 첫눈에 실망하는 게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부모님이 나와 아이의 장면에서 느꼈던 감정은 이전의 상담 경험에서는 해보지 못했던 느낌이었을 것 같다. 만약 내가 감성이 풍부하거나 누구에게든 공감 반응을 잘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 부모님은 나와 아이가 함께 하는 풍경에서 감동을 느끼기보다는 이전에 오랜 기간 받았던 숱한 상담 장면이 떠오르면서 익숙하고, 피곤한 감정에 빠졌을 것 같다. 그 상담을 다시 또 해야 하나 하는 그런 피로감.
아이를 데리고 오래 치료 센터를 다니는 부모님들은 그런 종류의 피로를 느낀다. 교과서에 나오는 맞는 말 좋은 말도 지겹고, 상담사스럽게 듬뿍 해주는 공감도 잠시만 귀를 달게 해 줄 뿐 현실을 바꿔줄 수 없기에 어느 순간 익숙하고 허무하다. 그 부모님과 이전의 상담 경험들을 나눌 때도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나는 그 부모님에게 그런 종류의 상업적인 공감도 해드리지 못한 것 같다. (근데 좀 억울하긴 하다. 나름 친절했는데.)
대신 그 부모님은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셨던 것 같다.
감정적인 공감을 잘해주어도, 내담자를 대하는 기본적인 가치관에 있어서 내담자를 부족한 존재로 생각하여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는 상담자도 있다. 공감은 해주는 데 정작 내담자에게 인간적인 관심은 없는 상담자도 있다. 자판기같이 누르면 나오는 공감 반응을 내담자들은 어느 순간 구별해버린다.
나는 다행히 내담자를 두고 우월감을 느낄 여지가 없고, 공감대가 될 수 있는 모나거나 모자란 부분은 넉넉하다. 서비스로 무료 제공하거나 자판기에 넣어 상시 팔 수 있는 넉넉한 공감의 재고는 전혀 없다. 그 만남의 시간에 내가 가진 관심을 다 털어 넣어야 겨우 내담자가 이해되고, 이해심 많은 어른보다는 장난 걸고 싶어 안달이 난 괴짜로 행동하는 것이 더 편하다.
나는 공감을 말하기 전에 '태도'를 말하고 싶다. 공감의 기술은 배울 수 있지만 태도는 선택하는 것에 가깝다. 내담자들은 공감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담자로부터 좋은 태도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강 건너 불처럼 관조하지 않고, 돈 받은 만큼만 제공해주는 것이 아닌, 나를 향한 온전하고 전적인 관심. 상담자가 아니었어도 나를 궁금해해주고, 나에게 물어왔을 것 같은 그런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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