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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빌 언덕 May 06. 2016

'공감' 못하는 상담자

초보 상담자 성장기

공감은 상담에 있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잘 공감받을 때 내담자들은 제대로 상담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공감은 상담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덕목이기에 상담이라고 하면 공감이 떠오르고, 공감을 잘 하는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너 상담하면 잘 하겠다'라고 말한다.


운동선수들 간에도 타고난 소질의 차이가 드러나듯이 상담자 훈련을 받는 과정 중에서도 타고난 공감 능력의 차이가 드러난다. 일반인들보다야 더 공감을 잘 한다고 해서 상담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들 중에서도 더 뛰어난 소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그럴 때 소질이 다소 부족한 나 같은 상담자 훈련생은 재능에 대한 열등감도 느끼기 마련이다. 


상담자 훈련을 받는 기간 내내 나는 동료에 비해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심지어 어느 정도 훈련 기간이 지나 상담자로 현장에서 돈을 받으며 일하는 동안에도 늘 열등감이 있었다. 상담자의 첫 번째 소질이 바로 공감능력인데도 나는 상담에서 공감을 잘 해주기 위해 늘 많은 애를 써야 했다.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 사람이 악보도 안 보고 술술 피아노를 쳐 나가는 것에 비해 나는 악보를 미리 다 분석하고 정리하여 하나하나 음표를 보고 짚어가며 느리게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다. 


상담자로서의 경력을 조금씩 진행해 가면서 나는 부족한 공감 능력 대신 다른 능력을 키워갔다. 어차피 부족한 공감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기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나름의 생존 방식이 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애써보는 것이야말로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모델링 소재가 아닌가?)


공감을 잘 못하는 상담자는, 공감의 반대에 해당하는 것을 잘할 수 있다. 


나는 내담자에 대한 객관화를 잘 해줄 수 있었다. 내담자가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자기모멸의 반복되는 수렁에서 헤매고 있을 때 나는 내담자와 함께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을 해나갔다. 자기 자신에 대해, 타인에 대해, 세상에 대해 한 가지 색깔로 드리운 막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모습을 보는 연습을 함께 해 나갔다. 어떤 내담자들은 나와 함께 자신의 모순을 찾아나가는 그런 과정을 재미있어했다.


또 나는 내담자의 부정적인 감정에 잘 저항할 수 있었다. 상담자도 사람인지라 내담자의 감정에 늘 영향을 받고 감정에 같이 함몰되는 경우도 생긴다. 나는 내담자가 감정적으로 덮쳐올 때도, 상담자로 하여금 부적절한 감정을 느끼게 할 때도 잘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정한 감정을 가진 어려운 내담자와도 오랜 상담기간을 함께 견뎌갈 수 있었다. 어떤 내담자에게는 그렇게 함께 오래 견뎌주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관찰을 잘할 수 있었다. 상담 시간 동안 나의 에너지가 감정에 사용되는 부분이 적은 만큼 나는 그 남은 모든 에너지를 내담자에 대한 관심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것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라는 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내담자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관심은 처음에는 드러날 때가 없지만, 상담의 중요한 순간에서 문득 내담자에게 던지는 말 한 마디에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내담자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가 문득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내담자는 처음에는 공감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다가도 그런 순간에 이 상담자가 자신에게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내담자들을 잘 이해했다. 나부터가 공감 능력의 부족을 늘 고민하며 살아왔기에 마찬가지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내면 과정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절절히 이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나쁘게 평가해도 나는 그들의 약점이 전혀  미워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안쓰럽고 사랑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자폐성 장애나 성향이 있는 내담자를 잘 상담해주었고, 공감능력을 포함한 사회성이 부족한 친구들의 사회성 증진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게 되었다. 그들도 나의 푸석푸석한 스타일을 편하게 여겼다. 


그렇게 다양한 나만의 장점과 길을 잡아가면서 공감에 대한 열등감은 점점 줄어들어갔다. 


타고난 공감 능력은 부족하지만 내담자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는 고민 속에는 내담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내담자와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는 보통의 상담자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지만 먼 길을 돌아서도 우리는 좋은 관계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공감은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내담자에 대해 다가가고, 만나고, 관심을 기울여주려고 하는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내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과 겸허한 관심이 단편적인 감정적 공감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공감에 있어서는 유능하지 못했으나 내담자에게 전적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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