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remy Mar 30. 2021

댓글의 무서움

내가 언제나 옳거나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근에 새로운 책이 새로운 옷을 입고 출간했다. 내 이름이 표지에 가지런하게 적혀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흐뭇해서 그 책을 꼬옥 안고 잠들고 싶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잠드는 기분일지, 아니면 사랑스러운 아이를 품에 안고 잠드는 기분일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책을 안고 잠드는 기분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고 싶다. 너무나도 소중한 나의 기록이자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저자명도 '조기준 지음'이 아니라 '조기준 산문집'이라 적혀 있다. 하나의 단어 차이인데도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꽤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산문집이라고 하면 왠지 글을 아주 잘 썼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들지 않을까 싶어 책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산문집이라는 명사가 당당하게 적혀 있어서인지 다른 산문집들을 얽기설기 쌓인 책더미에서 몇 권 꺼내어 나란히 놓아보았다. 하필 연암 박지원, 나쓰메 소세키라는 위대한 문장가들의 산문집에 손에 집혔다. 내 책을 그 옆에 두었을 때 당당할 수 있을까 싶어 슬그러미 다시 책더미에 옮겨 놓는다. 뒤쪽 아래쪽으로 숨겨놓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다시 책더미를 뒤지는데 이석원, 이병률 작가의 책이 보인다. 이 분들도 글 잘 쓰고 심지어 베스트셀러 작가분들인데 싶어 그냥 산문집이 주는 무게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읽혔으면 하는 마음만 품어보았다. 소심, 더없이 소심하게. 


그런데 문장을 적다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읽혔으면 한다는 표현이 괜시리 눈에 들어왔다. 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라고 쓰지 못했던 것일까. 곰곰이 떠올려보면 현실적으로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기획하고 편집하던 나는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문장을 정말 지겹도록 많이 보았으며 세뇌를 당하듯이 마음속에 품어 왔다. 전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는 문장도 숱하게 보아왔다. 하지만 왜일까.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내 책에 대해 악플까지는 아니더라도 '별로'라고 하는 부정적인 댓글을 달았을 때 왜 그렇게 그 댓글을 부여잡고 밤새 잠 못 들고 고민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내가 그렇게 못 썼단 말인가 하는 자책감을 넘어 가끔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이러한 상황이 내게 닥칠 것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훅 들어오는 충격과 파워는 상상 이상이었다. 사실 상상조차 한 적도 없었으니까. 


난 대범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 자기계발서를 많이 작업하고 나 역시 자기계발서를 출간도 했으니 자기계발이 잘되어 있다고 철썩같이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유리멘탈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철유리는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마주하게 되는 댓글들을 보며 아파한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고 또 미워했던가. 그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왜 나를 미워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난 그렇게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니 싶었다. 나는 그 몇 개의 댓글에 아닌 척하면서도 이렇게나 민감하게 받아들이는데 연예인들이 접하게 되는 악플의 강도는 어떠한 것일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연예인이 되면 심리상담도 종종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글을 쓰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요하고 잔잔한 일상이 펼쳐져 있기에 나도 매일매일이 그 일상같았으면 하는 마음가짐을 꼬옥 품으며 살아왔는데, 잔잔함에 반하여 번져가는 파문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싶다. 무조건 모른 척할 수만 있을까. 조금씩 조금씩 내가 모르는 분들에게 내가 드러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나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의 일까지 시나브로 오픈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출판된 책의 숫자도 늘어나고, 온라인 강의 횟수도 늘고, 대중 강의도 계속 잡히다 보니 나에 대한 평가가 블라인드 처리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면서도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댓글 공격은 두렵다. 그런데 이게 참 이상해서 안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 누군가 조언하지만 안 읽을 수가 없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하는 생각이 자꾸 강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담대해지자, 참고 넘기자,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이런 말은 참으로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서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당장 힘들어 죽을 것만 같은 사람에게 '힘내자, 우리'라며 나름 위로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말을 건넨다고 해서 위로가 되진 않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나겠지만 나를 비난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나겠지. 명치를 내리치는 것 같은 상실감과 충격을 받을 때도 있겠지. 그래, 내가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나만의 묘약을 찾아야겠다. 그래서 제아무리 태풍 같은 비난이 몰아쳐도 속사포 같은 미움이 쏟아져도 이를 거뜬히 막아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부서지지는 않을 만큼의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아프냐. 나도 많이 아프다.'라고 했던 드라마 대사처럼 많이 아픈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도 내 인생의 일부이고 내가 걸어가야 할 길 위에 놓인 커다란 바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하느냐에 따라 거대한 바위가 아니라 한낱 돌멩이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만드는 법을 찾아나가리라. 누가 뭐라고 해도 나만의 방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나답게 사는 것이고, 나로서 사는 것이겠지. 결론이 허겁지겁 마무리되더라도 이 역시나 나임을 충분히 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지금의 나로 살아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계약서에 작가가 왜 갑이냐구요, 누가 봐도 을인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