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만무방
데이빗 핀처 감독의 신작 '나를 찾아줘'가 개봉했다기에 영화나 보러 가려던 참이었다. 요즘 들어 돈을 너무 막 쓰는 거 아닌가 걱정도 들었지만 뭐 어때 문화생활인데. 자기 위로 쓱 한 번 해주니까 잡념이 눈 녹듯 사라진다. 누구 한 명 불러서 같이 볼까 하다가 오랜만에 혼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고 그냥 혼자 보기로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와보니 시간은 10시 56분경. 영화 내용 자체는 왓챠에서 봤던 리뷰 그대로 재밌었지만 러닝타임이 길다고 느껴지는 감이 적지 않아 있었다. 아무튼, 버스는 한참 전에 끊긴 시각이었다. 가방 안에 넣어둔 지갑을 꺼내 들고 택시 잡을까 생각하다가 오늘 택시까지 타면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은 없겠다 싶어 별수 없이 귀에 이어폰 하나 꼽고 요즘 푹 빠져 있는 에픽하이 노래를 들으며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집에서 게임이나 하면서 푹 쉴 생각 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달은 밝고 날씨도 적당해서 산책하는 기분이다.
30분쯤 걸었을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한테 인사 먼저 하고 씻어야지 했지만 벌써 주무시고 계셨다. 많이 피곤하신가 보다 싶어 그냥 대충 씻고 짐을 풀려는데... 지갑. 지갑이 안 보였다.
"아, 진짜."
마음속으로 한 생각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내뱉은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깜빡하고 지갑을 다시 가방에 안 넣고 손에 쥐고 있던 종이가방에 넣어둔 채로 계속 걸어왔었다. 그냥 걸어왔으면 망정이지, 심심하니까 종이가방을 발로 툭툭 차면서 걸어왔었다. 되짚어보니 어디서 어떤 식으로 잃어버린 것인지 상황이 대충 그려졌다. 아, 병신.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초조한 마음에 뭐부터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먼저 신고부터 해야겠다 싶어서 역에서 가장 가까운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사정이 이러이러한데 혹시 그 부근에서 확인 좀 부탁드려도 되겠느냐고 하니 경찰 아저씨가 딱하게 느꼈는지 연락처와 이름을 물어보면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한다. 나도 왠지 왔던 길 고스란히 되돌아가면 땅바닥에 지갑이 놓여있을 것만 같아서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좀 전에 시내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봤던 고양이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쟤는 왜 저기 가만히 앉아 있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마도 경찰일 것이다.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고양이가 놀랐는지 어디론가 뛰어 가버리고 나는 혹시 모를 기대감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예상했던 대로 경찰 아저씨의 전화였지만 내용은 썩 좋지 않았다. 쭉 한번 둘러봤는데 지갑은 못 찾았다고. 혹시 경찰서로 습득물 신고 들어오면 바로 연락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지갑이 놓여있을 법한 장소가 마구 떠올라서 일단 무작정 시내로 다시 가보기로 했다.
걸으면서 지갑에 뭐가 들어있더라 생각해봤다. 일단 현금 2만 7천 원. 학생증, 체크카드, 각종 보안카드, 나라사랑카드도 있을 테고.. 아 맞다 얼마 전에 엄마한테 받은 문화상품권 만 원짜리 두 장도 있다. 아 진짜 못 찾으면 아. 왜 또 하필이면 맨날 이천 원씩 들고 다니다가 오늘 오랜만에 돈 뽑았는데 잃어버린 걸까. 기억을 되짚을 때 필요할 것만 같아서 모아둔 수많은 영수증, 울산 번지식당 삼촌 명함, 홈플러스에서 알바하던 시절 협력업체 대리님들 명함, 몇 번만 더 찍으면 공짜로 하나 먹을 수 있는 각종 쿠폰들.. 고작 지갑 잃어버린 것 하나로 나의 지난 살아온 세월이 부정되는 기분이었다. 더 필사적으로 찾고 싶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지갑은 없었다. 없는 게 당연하단 듯이 낙엽만 떼구루루 굴러다니고 있었다. 낙엽이 지금 날 놀리는가 싶기도 하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털썩 앉았다. 뒷주머니에 무슨 느낌이 들어서 확인해보니 아까 혼자 영화 볼 때 팝콘이랑 콜라 사 먹고 남은 돈이 들어 있었다. 담배나 사서 한 대 피워볼까 생각하다가 '아 맞다. 민증도 지갑에 있지 참.' 오히려 잘됐다. 이 몸뚱이에 담배까지 뻑뻑 피워대면 말 그대로 산송장을 자처하는 꼴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영화도 그냥 현금으로 계산할걸. 지갑에 가지런히 들어있을 만 원짜리 두 장이 생각났다.
"으이구 병신아 병신아."
벤치에 벌러덩 옆으로 누웠다. 왔다 갔다 할 땐 몰랐는데 갑자기 몸이 술이라도 잔뜩 마신 양 무겁다. 술은 입에도 안 댔건만, 취한 기분이다. 이런 게 달빛에 취한다는 거구나 싶다. 문학에서만 보던 표현인 줄 알았는데.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도 아버지가 선물로 사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 드러운 팔자에 등신 같은 정신머리를 정말 어쩌면 좋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잠시. 집에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멀게도 느껴진다. 고작 지갑 하나 때문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까지 우울해져야 하나 싶기도 하고..
모르겠다. 오늘 하루는 그냥. 그냥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 뺨을 세게 한 대 쳐봤건만, 아프기만 하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시간은 오전 1시 13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벤치에서 슬슬 일어날 채비를 하니 저어기 밤하늘에 떠 있는 별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오는데 꼭 우리 아버지가 나를 바라볼 때의 눈동자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