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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Mar 27. 2022

우리 언니

이혼 후 이야기 #. 64




집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도망치듯 차키를 집어 들고 나왔다.


내비게이션에 언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입력하면서 

동시에 휴대폰을 집어 들어 언니 전화번호를 눌렀다. 


나 지금 언니 집에 가도 돼?


"그럼~ 당연하지. 지금 올 거야? 그럼 빨리 와, 같이 밥 먹게." 




엄마가 계신 친정은 멀고도 멀었다.

하루 만에 다녀오기엔 힘든 거리였다.

언니는 다행히 2시간이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다.



나는 언니보다 결혼도 먼저 한 새댁이었으나

마치 어린아이처럼

언니한테 일러바치러 가는 길이었다.


내가 사는 꼴을,

어지러운 내 마음을,

어렸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가 사람들과 남편을,


그리고


살아도 살아도 너무 힘든

이 현실들을.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고

뭔가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언니 집에 가면

그저

'동생'이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신혼생활을 시작했었다.


다시는 그 옛날처럼

시어머니를 모시기 싫다는

큰며느리의 결사적인 반대와

여러 시누들의 눈치작전

그리고 남편의 효심이 만든 결과였고

이 사람과의 결혼을 결정한

내 의무가 되었다.



30여분 걸리는 거리에 시누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친정에 자주 왔다.


자주 오는 만큼

'가족애'를 가장한 훈계가 이어졌다.


결혼생활을 시작한 동네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모두 시댁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만 아는 옛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고

그 추억 속에 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함께 웃을 수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언니네까지는 한 시간 이상

차로 달려야 했지만 

누군가와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있다 나는 그 길이 멀지 않았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한달음에 언니네 동네로 내달렸다.




잘 왔다고

밥은 먹었냐고

어서 이리 와서 앉으라는 언니가

커피를 내 오기 도전에

다급했던 나는 말문이 터졌고


내 속에 고름처럼 맺혀있는

비난과 원망이 가득한 울분을 토했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내 이야기를

돌림노래처럼 들어왔음에도 


마치 

오늘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새롭게 또 들어줬다.




언니도 맞벌이하며 아이를 키워야 했던 결혼생활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을 텐데

"야. 나도 힘들거든? 니 푸념만 하지 말고 내 얘기도 한번 들어봐."

라고 하지 않았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말문이 터진 어린아이처럼


집에서 할 수 없는 말들이,

어찌할 수 없는 불안하고 힘든 내 마음들이,

내 입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토하듯이 토하듯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함께 분노하고

함께 눈물짓고

함께 화를 내면서

동생이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남편은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고 있었고

시어머니에게는 '살갑지 못해서 내 아들 마음도 못 잡게 하는 며느리'라는 소릴 듣던 시기였다.


시누들에겐 '우리 엄마 뒷방 노인네 취급하면 가만 안 둔다'라는 말과

결혼생활 다 똑같지, 네가 좀 참으라는 시가 사람들의 말로 매일매일을 채워가던 날들이었다. 


보석 같은 아이들이 눈에 밟히고

너 같은 여자에겐 애들 절대 못 준다는 남편과는 냉전 중이었으며

남편보다 월급이 적은 

초라한 비정규직이었다.




죽지도 못하겠고 이혼도 못하겠고

그저 이글거리는 화롯불을 맨살로 껴안고 사는 듯한

날들이었다.



언니와 만나지 못할 때는 

터져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가슴을 누르며

회사에서 메일을 보냈다.

어디에든 털어놔야 내가 살 것 같았다.


어제 있었던 일들을

출근해서 일기 쓰듯 썼다.

힘들다고, 힘들다고 끊임없이 메일을 썼다.



회사 화장실에 앉아 울면서

손끝이 얼얼하도록 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내 마음을 말할 곳이

언니 말고는 없었다.




엄마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힘들다고

내가 지금 너무 힘들다고

엄마에게는 말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그렇게


나를 낳아준 엄마를 대신해

결혼한 딸이 행복하게 사는 줄만 알고 계실

고향의 엄마를 대신해


내게 '엄마'가 되어주었다.

엄마 대신 내 고통과 눈물을 혼자 다 받아주었다.



중간에서 해결도 못하고 그저 들어만 줘야 했던 그 심정이

고구마 먹은 듯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매일매일

삐그덕 거리는 감정의 쳇바퀴를 불안하게 굴리던

동생의 허우적거림을 보며 얼마나 괴로웠을까.


비관적이고 슬픈 감정은 전염도 빠르다는데 

이런 동생을 보며 얼마나 우울했을까...









이혼하는 마당에
그 집안 핏줄들 키워서 뭐하게?

"애들 놓고 나와, 너라도 편하게 살아.

나중에 크면 엄마 찾아온다더라.

혼자 떠안지 마."



지쳐가던 내가

이혼을 이야기했을 때

언니는 야단치듯, 때로는 협박하듯

말했다.


나더러

미련하고 또 미련하다고 했다.



죽었으면 죽었지

아이들은 포기 못한다는 동생을 보면서

혼자 감당해야 할 가장 노릇과

순탄치 않을 앞날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당연히 반은 섞여있을 그 집안 피가 싫었을 것이다.


미련하고 바보 같고 생각만 많았을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생을

여러 날 설득하려고 했다.




언니는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언니는 결혼생활 안 힘들어?
시댁 안 힘들어?
괜찮아?


나만 유난을 떠나 싶어 언젠가 물어보았다.



"내가 힘든 게 뭐 있니, 형부는 늘 우리 가족부터 생각해주고 시댁 형님도 아가씨들도 얼마나 좋은데...

내가 부족한 거지 그분들은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나를 너무 좋게 봐주신다.

나는 정말 편하게 사는 거야."



언니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맞벌이 었던 덕분에

어디 맡길 곳 없는 아이 둘을 형부와 치열하게 키워내면서

왜 힘든 적이 없었을까.


하지만 언니는

나처럼 성격이 메마르지도 삐뚤어지지도 않았는지

항상 좋게 생각을 했다.







언니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가난한 시골, 참고서 한번 맘껏 사줄 수 없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공붓벌레였다.


코피를 달고 살았고

낡은 책상에서 쪽잠을 자는 것이 

이불 안에서 자는 것보다 편해 보일 정도였다.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했으며 

후배들이 항상 따랐다.


언니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술만 드시면 회초리를 드는 아버지에게

"내가 왜 맞아야 하는데요?"라고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똑순이 둘째 딸이었고

무뚝뚝한 엄마가 칭찬을 하실 정도로

청소나 설거지도 완벽하게 했다.



그런 언니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언니, 동생들이 주렁주렁 있는 가정형편에

대학을 갈 수가 없었다.



결국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인문계고등학교로 가는 것을 지켜보며

상업고등학교를 갔고

졸업 후에는 엄마가 기뻐하시는 신협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경찰이 되고 싶어 했다.



 





엄마는 

내 자식이 당신처럼

휴일 없이 춥고 더운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아닌

유니폼을 입고 에어컨과 히터가 나오는

번듯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을 바라셨고 

또 자랑스러워하셨다.



신협에서 말끔한 유니폼을 입고 근무했던 딸이

더 이상 꿈을 지체할 수 없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경찰공무원 공부를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엄마랑 싸워야 했다.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와도 싸워야 했다.



언니는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출한 짐을 싸서 낯선 서울로 올라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공부를 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지하철에서 몽땅 잃어버렸고

100원이 없어 자판기 커피조차 마음껏 뽑아먹을 수 없는 

배고프고 서러운 날들을 보냈지만

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여경 선발 공고는 1년에 한 번

뽑는 인원은 한자리 숫자였고

엄청난 경쟁률과 내로라하는 경찰 지망생들과 겨뤘던 언니는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것 같았다.



20대 푸르렀던 언니는 

결국 경찰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다른 제복을 입게 되었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제복을 입고 근무를 하고 있다.


 

언니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엄마의 자랑이자 뿌듯함이 되었다.




그런 언니가 분노하는 유일한 포인트는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그렇게

무조건  편을 들어주었다.





나는 동생들도 있지만

우리 언니처럼 그런 든든한 '언니'는 되지 못한다.


힘들다고 푸념하면

지적할 것이 먼저 떠오르고

참지 못하고 꼭 해주고 싶은 충고가 나도 모르게

뭉게뭉게 생긴다.


'나는 더 힘든 것도 겪었거든?'

이런 본전심리가 발동한다.








언니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면

불같이 답답했던 가슴에

살얼음 낀 동치미를 한 바가지 퍼부은 느낌이었다.


언니와 이야기하면

갑갑했던 뜨거운 사우나에 오래 갇혀있다가 나왔을 때

숨통이 탁 트이는 그 기분이었다.


언니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시어머니와 남편이 있는 우리 집이 가까워올수록

다시 묵직한 체기가 느껴지곤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털어놓고 나면

또다시 일주일 살 수 있는 기운이 생겼다.




고단했던 결혼생활에

내 언니는 나에게 

대나무밭 그 이상이었다.


언니는

언제 찾아가도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주었다.




운 좋게 우리 둘 다 휴가가 맞았던 어느 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낸 후

식당에서 무려 7시간 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음식점 직원에게 권고 퇴장(?)을 당하기도 했고


언니 집 부엌

식사 후 설거지를 미뤄둔 식탁에서도

믹스커피 한잔으로 남자들의 술자리 같은 진득하고 진지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언니랑 이야기를 하면 

항상 나는 목이 쉬었다.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기 때문에

목소리가 갈라지고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러고도

수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곧 있으면 입을 닫아야 하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언니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충고나 '힘내라'라는 응원이 아니라는 것을.



리고 싶은 그 사람과 눈을 맞추고

한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너의 말을 듣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찾은 방법을 

조건 없이 지지해주는 것이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늘 나와 함께 하지 못하니까

언니를 먼저 낳아주셨나 보다





는 언니가 있다. 


친구보다 엄마보다 더 편하고 좋은 언니,

우리 언니가 있다.




언니는

내 브런치의 구독자이기도 하다.


징징거리며 써내는 동생의 못난 글을

읽고 또 읽어주는

조용한 구독자이다.





고마워 언니야.
내 이야길 들어줘서
내 편이 돼줘서
나를 살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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