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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Jun 02. 2022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

이혼 후 이야기 #. 66



부동산 어플을 열어 우리 집과 주변 아파트 시세를 확인해보았다.



저축해두었던 돈을 탈탈 털어 계약을 하고
등기를 한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 집값은 올라있었다.


"사장님, 우리 집은 얼마에 내놓으면 전세가 나갈까요? 월세는요?"


부동산 사장님에게 임대를 놓을 수 있는 가격을 물어보았다.
지금 이 집을 팔아도 손해는 아니었다.

오른 집값이

내 대출과 인테리어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기는 싫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대단지 아파트였고
초등학교가 바로 옆에 있었고
아파트가 많이 없는 이 지역에서
아기 엄마라면 들어와 살고 싶은 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은
내가 집을 사기 전부터도 고려했던 점들이었다.

그리고 소망이지만,
퇴직을 하고 나면 이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모님 댁은 올 리모델링이 되어 있어서 가격을 더 높여서 내놓아도 될 것 같아요.
같은 아파트에 나와 있는 매물들은 리모델링이 안된 집들이거든요.
이 가격에도 충분히 나갈 거예요."

부동산 사장님은 깔끔하게 인테리어 된 우리 집을 칭찬하셨다.


'맞아요...사장님, 예쁜집이죠.'



우리가 살 '우리 집'이었으므로
벽지, 화장실 수전, 문 손잡이까지 아이들과 의논하며 공을 들인 집이었다.

전자도어록도
식탁을 밝히는 등도
아이가 고민해서 결정했다.


하나하나 우리 마음과 생각이 알차게 들어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직접 타일과 벽지와 인테리어 소품을 골랐던 이 집을 전세를 주고, 우리는 학교 근처로 가서

다시 월세를 살기로 했다.


전세금이 들어오면 담보대출을 갚고
아파트 매매에 들어간 내 현금을 되찾아
내가 공부한 분야에 조금씩 투자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에 내놓았다


조명보다 환한

내 아이들의 미소가 깃든 우리 집을.












아이의 학교와 가까운 곳에는
적당한 아파트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파트 단지가 있기는 했지만
가격도 위치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내 형편으론 월세를 들어갈 수가 없는 가격이었다. 


월세로 나와있는 빌라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 내 집을 구하러 다녔을 때처럼
퇴근 후 인터넷과 지역 부동산 어플을 뒤지며 매물들을 메모했다.



관심이 가는 매물이 있으면
먼저 아이 학교 앞으로 갔다.
 
매물을 지도 어플에 찍고
학교에서부터 내 아이 걸음속도로 그곳까지 걸어가 보았다.
이렇게 걸리는 시간은 아이의 통학시간이 될 것이었다.


큰 도로를 건너야 하는 점과
밤길이 위험하진 않은지
주변에 무슨 건물들과 상권이 있는지 둘러보며 걸었다.


방문 약속을 잡아둔 집에 가기 전에
조금 일찍 나서서 아이 학교 앞에서 걸어가 보며 직접 동선을 확인했다.


한집 방문이 끝나면 다음 집을 가기 위해
다시 학교 앞으로 갔다.

학교와 가까울수록 월세가 비쌌다.
걸어가는 거리가 조금 멀고 집이 낡으면

월세가 훨씬 쌌다.



빌라지만 

아이들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고 낡지 않았으면 했다.
또다시 남의 집 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예전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나는 내 집이 있고
그것을 전세 주고 나온다는 든든함이 있었다.

언젠가는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살 거라는
소망을 갖고 있으니
전혀 서럽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엄마, 그거 알아?
이번 주가 우리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야.


이사날짜가 정해지자
아이들은 우리 집에서의 날짜를
하루하루 세었다.

우리가 함께 좋아했던 이곳을 떠난다는 섭섭함과

학교와 가까운 곳, 좀더 시내쪽에 산다는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이사 나가던 날,

우리 집을 보러 오신 가족이 당장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집안의 모든 등을 켜 두고

창문을 열었다.


앞뒤로 탁 트인 경관을 좋아하셨다.

이 집의 밝은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곧바로 전세가의 10%인 가계약금이 들어왔다.


내가 이 집을 샀던 가격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전세계약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 학교 근처에서 다시 세입자로 살게 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일곱 번째 이사를 했다.






세입자분은 한 달 뒤에 들어온다고 하셨다.

당분간 빈집으로 남아있을 집이

차라리 반가웠다.



퇴근하면서

익숙한 동네길을 따라
비어있는 우리 집에 가서 환기를 시켰다.



아이들과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식탁등

그 아래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기도 하고


새벽에 운동을 나가면서
고양이 세수로 잠을 깨우던
내 작은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기도 했다.


괜히 세면대 물도 틀어보았다.




우리의 발꼬랑내가 뒤섞였던 신발장에
더 이상 냄새가 나지 않았고
몸을 비틀며 요리조리 짐을 찾던 베란다도
더없이 넓어 보였다.


내 몸과 짐들은 이미 이 집에서 이사를 나갔는데

마음은 여전히 여기에 머무는 듯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고3 수험생인 큰아이를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많이' 공부하는 것이다.


부동산 투자에 관한 지식과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다.




혼자 벌어오는 이 월급으로는
내가 바라는 노후와

아이들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성인이 되어가는 아이들에게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노후에 기대지 않는 엄마가 되는 것과

둥지를 떠나 자립할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인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




공부해서 남주냐고

좋은 대학과 직장을 가고

성실한 직장인이 되라는 주문을 아이에게 하기 전에

나에게 먼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전세계약 잔금이 들어오던 날,

나는 은행에 미리 가서 앉아있었다.




세입자분이 잔금을 입금했다는
전화를 받은 뒤

창구로 다가가

통장과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




이 통장에 있는 돈으로
대출금 상환하려고 하는데요
...전부다요



그동안

내 발목을 묵직하게 붙잡고 있던
대출이

'0원'이 되었다.




...

살고 싶어서
살아보겠다고 내욕심에 애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양육비는 커녕

전 재산이

내 보험 해지환급금뿐이던

옛날이 떠올랐다.



기침하는 아이를 안고

유치원 가방과 퇴근 가방을 주렁주렁 매달고

감기약 처방전을 입에 물고

약국에 가면



따끈한 미열을 이마에 얹은채

두 눈을 반짝이며

뽀로로 비타민과

텐텐 영양제를 집어 들던

여린 아이가 생각났다.


체크카드 잔액 걱정 없이

사주고 싶었던

그때가 생각났다.





"안돼. 집에 많아요~ 또 사는 거 아니야~."



집에 가도 텐텐이 없는 걸 알지만

엄마가 거짓말하는 걸 알지만


떼쓰지 않고

울지도 않고

만지작 거리던 비타민

부끄러운 듯 조용히 내려놓던 딸.



그 긴 속눈썹을 내려다봐야 했던

그때가 생각났다.




나는 엄마다.


꿈을 꾸고

목표가 있고

반드시 해내고 말

엄마다.




엄마처럼 슬프진 말거라


엄마처럼
오래 서럽지는 말거라



엄마는 지금 아주 행복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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