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Jun 02. 2021

이혼 후 처음 갖는 내 집

이혼 후 이야기#. 56




조심해서 먹어. 벽에 국물 튀잖아~
주인아주머니가 집 깨끗하게 쓰라고 했어



어쩌다 보니...

오늘도 아이에게 잔소리를 했다. 


월세로 이사 온 집은 주인댁에서 리모델링을 막 끝낸 후 세를 놓은 집이었다. 


'계약 종료 시 베란다 창틀을 지금처럼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가야 한다.'는 계약서 문구에 마음이 상했지만 아이들을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키우고 싶어 튀어나오는 입을 꾹 다물고 도장을 찍었다.


민감한 사춘기 아이들을 위해 무리해서라도 깔끔한 집을 계약하긴 했지만 식탁 옆 벽지에 라면 국물이 튈까 봐, 가스레인지에 기름때가 낄까 봐 라면을 끓이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내 집을 가질 순 없을까...

월세비용이나 대출이자나 다른 게 뭘까. 

월세는 증발해버리고 없지만 대출이자를 낸다면 나중에 시세가 오른 아파트라도 남는 것 아닌가."



새벽이고 밤이고 틈틈이 읽어 나가던 부동산 책을 보며 생각했다. 



출퇴근 시간이 좀 피곤하더라도 아이들 통학거리를 고려해 학원과 상권이 발달돼있는 동네로 이사를 왔기에 주변 아파트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마트를 오가며 부동산 사무실 유리문에 붙여진 매물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5억, 6억이라는 숫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겁한 듯 돌아왔다. 



주말 아침에는 아이들이 잠에서 깨기 전에 운동화를 신고 옆동네, 옆 옆동네 아파트 단지들을 돌았다. 

여기는 아파트 주변에 무슨 학교가 있고 

어떤 상가들이 있으며 

부동산에는 매물이 얼마에 나왔는지 살폈다. 


버스정류장을 지나칠 땐 노선이 몇 개쯤 되는지 세어보았다. 


나라면 이 동네에서 애들을 키우며 생활하기 괜찮을지 상상해보았다. 



정문이 대리석으로 아주 웅장하게 되어있는 아파트에서 깔깔거리며 나오는 학생들이 부러웠다. 

정확히는 내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조경이 크게 만들어진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 보았다. 


공동현관문이 없는 아파트는 꼭대기 층까지 걸어서 올라가 보기도 했다. 


걷고 또 걸으면서 내가 여기에 살고 있는 입주민이라면~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1년 연세 계약이 끝나는 날이 몇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증발해버리는 월세를 또다시 주인집에 내고 한해를 더 살 건지 고민이 되었다. 


"생활비를 조금만 더 아끼면... 대출받아서 이자 내고 집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살고 있는 집 근처를 시작으로 매물 나온 것을 확인해나갔다. 

몇몇 매물 중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비싼 아파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매물을 게시한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집을 보러 가겠다고 약속을 잡았다. 


퇴근하고 네 곳의 집을 보기로 했는데 갑자기 두 군데의 매물이 사라졌다. 

이 동네 아파트값이 심상치 않다더니 팔겠다고 내놓은 아파트를 집주인이 다시 거둬간다고도 했다. 


"집주인 분이 퇴근이 늦어서 내일 집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네요. 주말인데 오실 수 있나요?" 


중개사분이 전화를 해왔다.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평수는 작았지만 지금 세 들어 사는 아파트보다 연식도 좋았다. 

주변에 뭐가 있는지, 교통편이 어떤지는 그동안 살면서 파악이 된 터였다. 


작은 아이 학교와도 더 가까운 아파트였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가서 다시 한번 아파트 단지 주변을 걸었다. 


'만약 여기서 산다면 큰 아이는 이 길로 걸어가서 버스를 타겠구나. 마트는 저기를 이용하겠네? 이 상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가 있네.'


여기서 아이들과 사는 상상을 하며 장점과 아쉬운 점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집주인이 팔기로 한 금액을 알고 있는 이상 좀 더 깎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백만 원이라도 깎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 달치 부식비인데... 



시간이 되어 중개사님과 만나 집을 보러 들어갔다. 

집을 팔려고 내놓은 주인분은 오는 사람들마다 자꾸만 백만 원 이백만 원 깎아달라고 한다며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깎으려면 아예 사지 말고 가시라는 의중을 내비쳤다. 


집을 보려는 사람들은 많아서 집주인분도 급해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들처럼 괜히 깎아달라는 말을 했다가 정말 기분이 상해서 더 이상 진행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저녁에도 또 한 팀이 이 집을 보러 올 거라고 중개사님이 말했다. 

하지만 당장 결정할 수가 없었다. 


연락을 드린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에 앉아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렸다. 

내가 모아둔 자금과 방금 보고 온 집의 시세, 그리고 주변 아파트의 최근 거래건수와 금액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깎아주지 않겠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대신 몇 달 뒤면 그 금액 이상으로 집값이 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혼이었던 집주인은 아직 이 단지 아파트 시세가 꿈틀꿈틀 올라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중개사님, 가계약금 넣을게요. 계좌주세요." 


전화를 드린 후 바로 가계약금을 송금했다. 

적은 가계약금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사장님. 계약서를 일주일 정도 앞당겨서 쓰고 싶은데요. 중도금은 제가 그날 바로 넣어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매달 고정 지출비만 쓰고 악착같이 모아뒀던 돈으로 중도금을 빨리 치렀다. 

계약서는 썼지만 대출을 내서 남은 잔금을 치러야 하기에 실감이 나진 않았다. 


이제는 집주인이 계약을 철회하고 싶어도 못할 상황이 되었지만 잔금일도 한 달 정도 앞당기기로 했다. 


방문했을 때 파악했던 바로는 도배, 장판이라도 새로 하고 들어가야 할 집이라 시간을 좀 더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은행에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던 날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잠깐 외출을 허락받았다. 


"집을 산다고? 부자네 부자야. 이 동네에서 집도 사고. 그런데 제대로 알아보고 사는 거야?" 


대출이 절반 이상이라고 말하며 씽긋 웃어넘겼다. 


돈이 넉넉하게 있어서 집을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은행에서 대출서류에 도장을 찍던 날 

회사 동료는 대출을 받아 번쩍번쩍한 외제차를 샀다. 


10년이 훌쩍 넘은 내 차는 잔고장이 나서 수리비가 자꾸 들어가고 있었다. 


"땜빵 수리만 하지 말고 차를 바꿔~~ 차를." 


내 차가 부끄럽지도, 그들의 외제차가 부럽지도 않았다. 


내가 내년에도 월세를 내며 지금과 똑같이 살고 있을까 봐, 아이에게 벽에 국물 튄다고 여전히 타박하고 있을까 봐 그게 더 두려웠다. 


월급보다 훨씬 더 많은 취득세를 내며 잔금을 치렀다.

은행에서 인감도장을 건네주는데 손이 떨렸다.


그리고 몇 달 후, 내 이름으로 된 등기필증이 도착했다. 




"딸, 이거 봐! 등기필증, 집문서. 우리 집이라는 거야."


"그럼 이 집에서는 국물 좀 튀기며 라면 먹어도 돼?"


아이의 소원은 소박한 것이었다. 




거꾸로 감기는 필름처럼 

십 년 전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집에서 나가 달라는 전 남편의 말에 사정하듯 부탁해서 겨우 데리고 나올 수 있었던 나의 분신 6살, 8살 어린 딸들. 


이 아이들을 키워내기 위해 내 보험에서 3천만 원 대출을 받아 곧 재개발로 허물어질 달동네 다가구 주택을 전세 계약하고 맨손으로 고치던 그때의 모습이 생각났다. 


집 앞에는 주차할 군번(?)이 안되어서 아이를 업고 오르막을 오르며 길 건너 주차장이 있는 낡은 아파트 단지를 한없이 부럽게 쳐다보던 열 살 젊은 내가 떠올랐다.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된 이 아파트는 주차할 자리가 차고 넘쳤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였고 

힘들지 않게 지하주차장에서 집까지 올라올 수 있는 아파트였다. 


슬리퍼를 신고 편의점과 마트와 극장을 갈 수 있는 아파트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정처 없이 떠돌던 10여 년의 기억들이 잔잔하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십 년이 걸렸구나 십 년이... 




대출로 잔금을 내드리고 아파트 인테리어를 계획했다. 


열 군데가 넘는 곳의 견적을 비교했다. 

퇴근 후, 주말을 바쁘게 미팅하며 견적서를 읽고 또 읽었다. 

사장님들을 귀찮게 했다. 


"계약금을 좀 더 넉넉하게 드릴게요. 현금가로 좀 깎아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일수록 한 달 부식비를 깎을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된다 해도 머리 한번 조아리는 게 뭐가 힘들까. 

없는 척 불쌍한 척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인테리어 중에도 음료수와 초코파이를 사다 나르며 작은 부분들을 서비스로 요청했다. 


요청대로 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했고 또 표현했다. 


3주가 빠르게 흐르고 인테리어도 마감이 되었다. 




이사 전 입주청소를 의뢰했다. 


십 년 전에는 돈도 없었고 내 손으로 직접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은 비용을 쓰기로 했다. 


업체에서 나를 대신해 청소를 해주는 그 시간에 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공주풍 침대를 보러 갔다. 

아이 마음에 쏙 드는 침대를 주문했다. 

다 큰 아이들은 방방마다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우리 집이야 우리 집~!
저기 봐 우리 학교가 바로 앞이야~ 

주인집이 아닌 

우리 집이라는 사실에 두 딸은 들떠 있었다.




우리 집으로 들어갈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사를 하루 앞둔 날 

늘 그랬듯 새벽 4시 전에 눈이 떠졌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아이들이 발로 차낸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환기를 시키러 새집에 갔다. 


곧 우리의 온기가 가득할 집에 들어가

거실 창문과 아이들 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나보다 일찍 일어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모두 열어둔 뒤

부엌 벽에 가만히 기대어 앉았다. 




십 년 전 낡은 경첩 나사를 무뎌진 드라이버로 힘겹게 돌리다가 벌겋게 부어오른 손으로 삐걱대는 싱크대 앞에 이렇게 앉아있던 내가 생각났다. 



8월의 폭염 속에서 

시원한 냉면이 생각났지만

돈을 아끼느라 아니 시원함조차 죄스럽고 사치인 것 같아 

뜨거운 옥수수 두 개를 사다가 힘없이 베어 무는 내가 보였다. 



절망만 가득했던 불안한 시선으로 쏘아보던 유행 지난 그 집 벽지의 패턴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방 한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나의 자세는 똑같았다. 


단지 상황과 시간이 달라져 있었다. 


힘없이 들썩이던 그때의 내 겁먹은 울먹임이 더는 없었다. 


슬프지 않았는데, 겁나는 것도 없었는데 조용히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목구멍에 뭔가 걸린 듯이 따끈하게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 힘들었니? 


괜찮아? 


아무도 안 보니까 울고 싶으면 울어. 


괜찮아. 


괜찮아, 우리 집이잖아. 




차마 흐르지 못하는 굵은 방울방울을 

두 눈에 그렁그렁 매단 채


목에 쉰 소리를 내며

크게 크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이 냄새, 

이제 내 집 냄새였다.


 '우리 집' 냄새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